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12
강인이 몇 주 동안이나 집에 들어가지 않고 용환의 자취방과 슈퍼마켓 지하창고의 연습실 사이를 오가며 죽치고 있는 동안 용환은 민효에게서 받아온 주사위에 대해 강인에게 말해야 할지 비밀로 할지를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작정했을 때 강인은 연습실에서 카세트 플레이어로 녹음된 데모 테이프를 듣고 있었다.
용환은 민효가 데리고 있던 다 나이디의 손에 나타났던 신기한 현상에 대해 몇 번이나 침을 튀겨 가며 강인에게 설명했지만 강인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본래 다른 사람이 민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용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강인의 지나치리만큼 무관심한 태도는 용환을 서운하게 했다.
“너, 내 말 못 믿는 거야? 그 여자 아이 손바닥에 갑자기 글씨가 나타났다고.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기억을 주라’는 글씨가 나타났단 말이야. ”
“믿어.”
간단한 강인의 대답에 용환은 적이 놀랐다. 용환은 카세트 플레이어의 볼륨을 일시에 줄여 버렸다.
“믿어? 내 말을 믿는단 말이야?”
“그래. 두 번 대답해야 돼?”
“넌 그게 놀랍지 않아?”
“놀랄 일이 한 두 가지라야 말이지.”
용환은 너무나 황당한 기분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하, 이제는 면역이 되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 주사위가 기억을 복사한다는 사실도 너는 믿겠군?”
“믿긴 하지만, 난 그 주사위로부터 누구의 기억도 받은 바가 없어. 하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기억이 유출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믿어. 작년이던가, 재작년이던가. 교향곡 X+1번 애도. 그 노래 기억나?”
“말도 마라. 네가 죽을 뻔했던 사건을 어떻게 잊냐? 그런데 그 노래는 왜?”
“민효가 내게 그런 말을 했었지. 갑자기 텔레파시라도 통했는지 윤이(강윤)가 자신의 기억을 읽어냈다고 말이야. 나는 생각도 나지 않는 일을, 더구나 민효도 나도 윤이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일을 윤이가 알고 있더래. 윤이는 내가 노래하는 걸 듣고 있다가 홀연히 그 기억이 물 스미듯 뇌로 스미는 걸 느꼈다고 했다던가.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 놈은 그런 이상한 얘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
“이상한 얘기가 아닐 거야. 하지만, 넌 민효와 윤이가 사이좋게 지내는 게 싫은가 보구나.”
용환은 예리하게도 강인의 심중을 간파했다.
“아니. 그애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해. 하지만 뭐랄까, 그애들 사이에는,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뭔가 보이지 않는 결속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와 민효 사이에는 그런 게 없어. 나는 그게 싫었어. 미치게 싫었어. 도대체 무슨 결속력이 그애들을 묶고 있었을까. 나는 모르겠어.”
강인은 친구가 줄여놓은 데모 테이프의 볼륨을 높였다. 데모 테이프에 녹음된 노래는 다름아닌 장유경이 작곡한 ‘희’였다. 녹음된 강인의 목소리가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닫자 용환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이 노래가 싫었다. 아니 싫어하기에는 너무 훌륭한 곡이다. 그러나 뭔가 모르게 사람의 속을 뒤집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싫었다. 용환의 불쾌한 심중을 포착한 듯 강인이 갑자기 카세트 플레이어를 껐다. 딱딱하게 굳은 강인의 표정을 본 용환은 솟아오르는 한 가닥의 불안감을 애써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나, 사실 이거 싫다. 꼭 뭐랄까. 갈비뼈 하나가 부러져서 폐를 찌르는 느낌이랄까. 듣고 있으면 몸 어딘가가 욱신거리면서 쑤신단 말이야.”
“전에는 창자를 칼로 도려내는 느낌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나?”
강인은 옆에 있던 다른 데모 테이프를 집어들어 카세트 플레이어에 끼웠다. 무심코 케이스를 집어 든 용환은 피식 웃으며 강인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내질렀다.
“무슨 청승을 떨려고 이 오래 된 걸 들으려고 그래.......”
강인이 집어 든 테이프에 수록된 곡들은 아주 오래 전, 디아이 셀이라는 이름도 채 지어지기 전에 만들어진 곡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낡은 테이프는 이용환과 강인이라는 두 콤비의 깊은 우정과 동료애의 역사이기도 했다.
“확인할 게 있어.”
음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귀에 익은 드럼과 기타의 반주는 기분 좋게 좁은 연습실 안을 채웠다. 두 사람은 리듬과 가락에 몰두하며, 또한 다소 겸연쩍은 심정에 젖어 자신들이 만든 음악을 들었다.
한 번이라도 네가 나를 위해 웃어준다면
난 널 위해 살인이라도 할 수 있어!
강인의 목소리가 최고조로 달한 순간 갑자기 모든 소리가 정지되었다. 강인이 갑자기 파우스(pause)버튼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용환이 입을 열어 왜 갑자기 멈추느냐고 말하려는 순간 강인이 그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못 느끼겠어?”
“뭐?”
“아무것도 못 느끼겠냐구?”
“뭘 느껴야 한다는 거야?”
“이상하지 않아? 내 목소리. 이 목소리하고, 방금 전에 ‘희’를 부르던 목소리하고는 확실히 달라.”
“당연히 달라야지. <화산>이 대체 몇 년 전 노래냐? 너는 나이가 들었고, 또 목소리라는 게 원래 시시각각 변하는 거 아니냐. 어떻게 그때랑 지금이랑 똑같을 수 있다는 거야?”
“그게 아니야.”
강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강인의 얼굴을 쳐다본 용환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으려던 숨을 도로 들이켰다. 그가 본 강인의 얼굴에는 뭐랄까, 충격을 어느 정도 포함한 비장감이 감돌았다. 마치 화재 현장에 도착해 눈 뜨고 못 볼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소방수의 표정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그런 표정이었다. 강인은 깊은 생각의 수렁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내 목소리는 계속 변해왔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야. 목을 많이 쓰면서 전보다 음색이 거칠어졌지만, 그런 건 괜찮아. 쉰 목소리가 오래 계속되는 것, 내 마음대로 음정 조절이 안 되는 것, 갑자기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도 다 참을 수 있지만, 그런 걸 참아가면서까지 부르는 노래가 이런 느낌이라면, 참을 수가 없어.”
“이런 느낌?”
“뭔가 지저분하게 썩어가는 느낌. 난 내가 들은 내 목소리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어.”
용환은 강인이 자학의 징조를 보이며 머리라도 싸안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강인의 행동은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
“인아!”
말도 안 돼. 네가 음악을 필요로 한다면, 음악 역시 너를 필요로 해. 네가 강윤을 이기려는 목적에서 이걸 시작했다 해도, 늘 너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천재성 때문에 괴로워했다 해도 이제는 뮤즈가 네게 매달릴 때야. 그러나 강인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것을 용환 자신이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는 말만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불길한 마음까지 애써 달래며 용환은 강인을 어떻게든 안심시키려 했다.
“내 생각에는 네 목소리보다도 저 노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희>말이야.”
“그래? 단지<희>를 부를 때만 내 목소리가 그 꼴이야?”
용환은 말문이 막혔다. 최근 들어 <희>가 아닌 다른 노래를 부를 때의 강인의 목소리가 어땠는지는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온통 그 노래만 불렀으니까.
“우리 K클럽 공연이 다음 주로 예정된 거 맞지?”
“다음 주 토요일. K클럽 수용인원이 적어서 좀 걱정이다. ”
“그렇게 많이 오지도 않을걸.”
“강인.”
“왜?”
“자부심을 가져라. 넌 최고야.”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솔직한 찬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강인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의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도 최고야. 하지만, 최고의 세계는 평화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지. 안 그래?”
“너 혹시, <애도> 때처럼 이번에도 뭐 사고 칠 작정이야? 말투가 어째 그렇다?”
“사고치면?”
“장난하지 마라. 심각하게 묻는 거다.”
강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용환은 강인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긴 있는 거군. 그러나 이번에는 꿍꿍이가 있다 해도 사정이 다르다. 강인은 흔들리고 있다. 게다가 그 녀석의 문제는 그 녀석 한 사람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강인이 애써 의도하지 않아도 사고가 날 것 같다. 제발, 신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연습하자. 진호하고 헌수 불러라. ”
“진호 자식은 은하랑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도통 게을러지는 것 같단 말이야.”
“냅둬라. 그거 모르냐? ‘노세노세 떼노세. 장가가면 못 노네?’”
“짜식!”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