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13
강태규 박사의 집은 시내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 있는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넓고 평평한 골목을 4, 50미터만 빠져나오면 금세 4차선 도로를 마주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한 막다른 도로인지라 차가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독자들에게는 매우 애매한 설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복잡한 추가 설명을 덧붙여 보자. 본래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어했던 강태규 박사가 더 외진 곳을 거주지로 택하지 못한 이유는 학교에 다니는 아들들을 비롯한 가족들의 교통 문제를 고려해서였다. 그렇다고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도심 한복판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비록 변두리라 해도 사람이며 건물이 밀집한 곳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 마지로 얘기해서 문명의 이기는 적당히 누리되, 인간이 빚어내는 공해를 극도로 꺼리는 주의였다. 다행히 그들의 집은 주위에 저수지가 있는 큰 산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 산이 그린벨트로 지정된 탓에 아직 미개발구역으로 남아 있어 집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으나 그 점에 대해서도 가족들 중 어느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과 같이 젊은 여자가 혼자 집 밖을 뛰쳐나가는 소동이 벌어졌을 때 그녀의 행보를 눈여겨 보았다가 나중에라도 목격자나 증인이 되어 줄 사람이 드물다는 것 또한 이 동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목격자는 고사하고 어느 질 나쁜 인간이 혼자 울며불며 길을 걸어가는 여자를 보고 흑심을 품어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강윤의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않았지만, 그는 민효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보자마자 그 즉시 뒤따라 뛰쳐나갔다.
때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이라 선선하다 못해 다소 쌀쌀한 밤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강윤은 자신의 발걸음보다 더 빠른 자신의 시선으로 민효의 뒷모습을 추격했다. 비틀거리는 가냘픈 실루엣을 포착한 그는 뛰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손쉽게 민효를 붙잡았다.
“도대체 문도 안 잠그고 이 꼴로 왜 뛰쳐나와......”
민효는 몇 걸음을 더 걸어가려는 듯 발을 버둥거리다가 이내 멈추었다. 강윤은 그녀의 몸을 뒤로 돌려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에 콧물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난 너하고 그 짓을 했는데......어째서.......왜 나는 강인에게 그렇게 못됐게.......”
그 상황에서 강인의 이름이 나오자 강윤은 아찔한 통증을 느꼈다. 그게 이렇게 울 정도로 대단한 문제였단 말인가? 강인에게 가혹하게 대했다는 사실이? 자기가 한 짓은 까맣게 잊고 다른 여자와 잔 강인을 미워한 게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이유라고? 이번에도 그 이유에 내 이름은 없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대며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인적이 뜸한 동네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우는 거야? 강인 때문에?”
“아니야.......”
콧물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두 사람 모두 휴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민효는 손등으로 콧물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린아이를 대하는 기분이 들어 강윤은 더 이상 그녀를 윽박지를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에 본 다 나이디가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신기한 일이 다 일어났을까? 지금도 믿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헛것을 경험한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 울어. 이제 와서 울어 봐야 소용없잖아.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에 없이 허탈한 기분으로 강윤이 중얼거렸다. 너는 모른다. 내 인생에서 너를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을. 민효는 조용히 차고 넘쳐 흐르는 눈물을 양 손으로 번갈아 쉴새없이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밤이었다. 어둠이 격앙된 그녀의 심중을 조금은 달랬는지 그녀는 눈물을 그치고 몸을 돌려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째서 나는 기억을 못했을까? 아니 그보다도, 용환이가 모든 걸 다 본 건 아닐까? 그저 내가 흘린 피만 본 걸까? 모든 걸 다 보고도, 그 소파 뒤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다 알고도 시침을 뗀 건 아닐까?”
민효는 강윤이 어떤 대답이든 해 주길 기대했지만 강윤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민효의 처녀막이 터지면서 나온 피. 분명 그 피를 본 거야. 강윤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내가 여자의 몸을 찢다니. 찢어진 몸에서 피가 배어나오다니!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신의 옆에서 걷는 민효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처음부터 강인을 사랑한 게 아니야. 나는 알아.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지만, 나는 너를 빼앗겼어.
“용환이가 모든 기억을 다 알지는 않았겠지. 그랬다면 굳이 그 얘기를 네게 하지 않았을 거야. 소파라든지 피라든지 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을걸.”
“나중에라도 그가 알게 된다면?”
“무슨 상관이야!”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거칠어지는 말투를 의식하며 강윤이 반문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 마디라도 했다간 죽여 버릴 거야.”
“우리는 어떡하지?”
민효의 입에서 지극히 빠르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이 질문 때문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윽고 강윤이 민효의 등을 툭 쳤다.
“뭐가 문제야? 우리가 뭘 했는데?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해? 그 일은 서로 깨끗하게 잊어버리기로 했잖아. 나이디가......”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이디, 다 나이디.”
나이디란 이름을 듣자 민효는 아! 하고 외치며 펄쩍 뛰었다.
“나이디를 그냥 내버려두고 왔어. 이 일을 어쩐담. ”
그녀는 집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반대로 강윤의 발걸음은 느려졌다. 이상하다......나이다는 내가 민효와 한 짓을 알고 있었고, 그걸 내게 말하기까지 했다. 그 직후에 민효가 그 일을 기억해냈다?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민효는 그때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믿고 있었다. 민효가 그 일을 기억해 낸 건 이용환이 주사위로부터 받은 기억을 그녀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 일련의 사건이 다 나이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 나이디가 그 주사위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을 조종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의 척추를 따라 오싹한 전율이 올라왔다가는 다시 내려갔다. 젠장, 죽어가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니었어. 이런 성가신 걱정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