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15
민효는 자신이 용환에게 주사위를 빌려 주게 된 경위를 선글러스 남자에게 간단히 이야기했다. 선글러스 남자는 주의깊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말했다.
“그녀가 그럴 이유가 없는데.....”
“뭔가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다 나이디는 여전히 민효의 팔에 안긴 채 갓난아기처럼 눈만 또록또록 굴리며 주위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선글러스 남자의 얼굴에 삽시간에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매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라면, 곤란합니다. 적어도 그 주사위가 강윤 군의 손에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내 손에 있어 본 적도 없어요. 처음 몇 주를 제외하고는.”
강윤이 약간 가시돋친 목소리로 반박했다.
“화내지 마십시오. 어쨌든 그 주사위에 대한 권한은 지금으로서는 강윤 군에게 있으니까. 그런데도 다 나이디가 그 주사위를 밖으로 내보내다니, 도대체 뭘 하려는 거였을까요?”
“내가 묻고 싶군요.”
그때 민효가 재빨리 대답했다.
“새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기억이 필요했을지도. 왜냐하면, 그 주사위가 우리 집 사람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복사된 기억들 가운데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요.”
강윤은 자신도 모르게 민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민효는 쓴웃음을 지으며 강윤의 시선을 맞받았다. 조롱과 냉소와 비애가 한데 어우러진 눈빛이었다. 미소를 띤 입술이 그 눈빛의 격렬한 분출을 막고 있었다.
“오늘은 틀렸군요.”
선글러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는 곤란한데.......하지만, 다 나이디가 허락했다고 하니 할 수 없지요. 다음 번에 제가 왔을 때에는 반드시 주사위를 돌려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저 역시 그 주사위인지 뭔지를 빨리 떠나보내야겠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강윤은 자신의 불만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선글러스 남자가 질질 끄는 발걸음으로 현관을 나간 후에도 두 사람은 말없이 그가 사라진 현관 쪽을 응시했다. 민효는 눈을 깜박거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 나이디를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참 이상한 건........”
민효는 나이디의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걸 물어볼 생각을 못했어.”
“그거라니?”
그때서야 강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주사위 말이야.”
민효는 한숨을 지으며 한 팔로 소파의 등받이를 잡고 몸을 기댔다.
“왜 인이만 비껴가는 걸까? ”
“인이만 비껴간다고?”
“그 주사위에 새겨진 기억을 읽지 못한 사람은 인이 뿐이었어. 너, 그리고 나, 그리고 그 여자(장유경), 그리고 이용환, 또 앞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모르겠지만, 인이는 누구의 기억도 읽지 못해. 이상해........”
민효의 눈에서는 더 이상의 경악이나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념을 한 건지 뭔지는 몰라도 강윤으로서는 다행스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민효는 체념을 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기억해 낸 무서운 기억을 아무것도 아닌 사고로 치부하기로 작심한 것도 아니었다.
“강윤.”
“왜?”
“너는 처음부터 다 기억하고 있었지? 내가 잊어버리고 있을 때도, 너는 항상 그 일에 관해 기억하고, 또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지?”
그걸 말이라고 해? 항상 기억했지. 항상 생각했지. 그렇고말고. 나한테는 두 번 다시 있을 수가 없는 기억이니까. 그것만큼은 아무도 가져가서는 안 돼. 아무도.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민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절대로 강간 같은 거 못해. 절대로. 내가 널 거부한 게 아니지? 그렇지? 내가......내가 피를 많이 흘렸니?”
민효는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려 한다고 강윤은 생각했다. 강간한 게 아니라면 어떻단 말인가? 피를 좀 많이 흘렸다 한들, 또 그게 망각의 무덤에 매장되지 않고 살아나서 이용환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심지어는 강인에게 들어가게 된다 한들 그게 어쨌다고? 만약 그 기억이 누군가에게 들어가게 된다면, 절대 ‘그것’만 옮겨지지는 않을 거야. 내 마음도, 민효를 짓밟았을 때의 내 마음도 같이 옮겨지는 거야.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는 거야. 내가 오로지 한 사람만 미치게 사랑해왔다는 걸 말야.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얼마나 무정한지도 말이야. 그런 것들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어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