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Ⅱ-16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16



민규는 투덜거리며 K클럽 앞에 세워진 사다리 모양의 광고판에 휘갈겨 적은 공지문을 쳐다보았다.


디아이 셀(DI cell). 오후 8시. K클럽



“8시면 너무 늦잖아?”

그러자 옆에 있던 그라이아이 밴드의 드러머 금장석이 수수께끼에 답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밤이 사람을 미치게 하니까. 인이 녀석, 그걸 이용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디아이 셀 멤버들은 여느 때와 달리 조용히 공연을 준비했다. 진호와 용환이 제각기 자신들의 악기를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동안 헌수는 시종일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케이스에 든 데모 테이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방금 용환에게서 유경이 강인에게 준 ‘희’가 수록된 테이프를 건네받은 참이었다.

“이거 하나 때문에 그 난리를 쳤다니......”

강인이 유경과 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는 강인이 없었다. 있었다 해도 그는 헌수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막지 않았을 것이다. 강인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었다.

“그 난리?”

이미 그 테이프에 수록된 ‘희’는 디아이 셀 멤버들에 의해 다시 깨끗하게 편곡되어 재녹음되었다. 따라서 그 테이프는 지금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인이 유경에게서 그 테이프를 건네받기 위해 했던 엽기적인 행각들로 인해 그 테이프는 K클럽의 모든 뮤지션들 사이에서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상태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봐야 여자와 남자가 같이 잔 거, 그뿐이잖아?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장유경이 진짜로 인이를 사랑했다면? 그랬다면 또 다른 문제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그러나 용환 역시 장유경이 강인을 정말로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민효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그는 민효로부터 빌려 온 주사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젠장, 그 주사위는 아직 아무것도 가르쳐 주는 게 없다. 나는 그를 찾아야 하는데, 그리고 그가 깨우쳐 준 사실들을 기억해내야 하는데.

헌수는 용환이 무슨 생각을 하든 아랑곳없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곡 말이야, 진짜 이상한 곡이야. 몇 번이나 드럼 비트를 반복하다 보니, 장유경은 진짜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어. 정말 아무리 계속해서 연습해도 싫증나지 않아. 오히려 신이 나.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뭔가 오싹한 데가 있어.”

“집요하고, 끈적끈적하게 감기는 느낌이야. ”

듣고만 있던 진호가 헌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때 좁아터진 출연자 대기실의 문이 열리면서 민규가 나타났다. 민규는 들어오자마자 용환의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똑똑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장유경’이라는 이름을 거론했음을 알아차린 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민규는 나가면서 용환에게 말했다.

“끝날 때까지 인이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 해. 알았지?”

용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가 나가자 드럼 스틱을 돌리던 헌수가 말했다.

“저 자식은 무슨 얘길 너한테만 얘기하는 거야? 인이한테 말하지 말라는 건 또 뭐야?”

진호가 헌수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드럼 세팅하러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강인이 K클럽에서 ‘희’를 부르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민효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공연을 보러 가리라고 결심했다. 그녀가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K클럽을 찾은 것은 지금껏 단 한번 뿐이었고, 그 한번의 공연에서 그녀는 간질 증세를 보이며 실신했고, 그 후로는 그의 공연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진호와 용환에게 전화를 걸어 공연 날짜와 시간을 알아냈다.

“웬일로 이번에는 우리 공연을 다 보러 오겠다는 거지?”

전화를 끊으며 진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희’를 들으러 오려는 거야. 그래.

진호로부터 민효가 공연을 보러 가리라는 말을 들은 은하는 민효에게 자신과 같이 갈 것을 권했으나 민효는 거절했다. 그때처럼 또 실신하면 어떡하느냐는 은하의 말에 민효는 이렇게 대답했다.

“농담으로 들을게.”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다녀올 생각이었다. 확인하고 싶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강인이 그녀를 위해서 노래를 부를까? 그녀는 장유경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연거푸 떠올렸다.

‘그가 날 위해서 노래 부른다면, 당신은 날 미워하겠죠?’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민효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유경이 했던 또 다른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당신이 강인에게 순결을 잃었다는 말, 뭔가 이상하게 들려요.......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같이 잔 사람이 강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잊고 있었단 말이다. 꼭 꿈을 꾼 기분이다. 이게 다 그 주사위 때문이다. 그 주사위가 쓸데없는 소문을 암암리에 퍼뜨리고 다니는 거야. 그러나 나는 내게 있어서 끔찍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깡그리 잊어버리지 않았나. 그것만은 그 주사위로도 설명할 수 없다.

민효는 갈색의 반소매 블라우스에 색이 바랜 청치마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무덥던 한낮의 열기가 다소 가라앉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오래 전, 몇 달 동안이나 이 집에 갇혀 한 발짝도 나설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당시의 유폐 생활은 그 이후 계속해서 그녀의 의지를 지배했었다. 버스에 올라 무심히 낯선 창 밖을 내다보면서 그녀는 그 시절을 떠올렸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없었다. 금족령이 풀리고 자유롭게 나다니게 된 후에도 그녀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외출하지 않았다. 빛나는 네온사인 아래로 지나가는 검은 사람들의 실루엣을 헤아리며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세상을 용서하지 않았어. 세상도 역시 나를 용서하지 않을지 모르지.

K클럽 내부는 화재의 우려를 피할 수 없는 위치나 여건 때문에 기본적으로 금연 구역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대책없는 골초들이 우글거려서, 콘크리트를 깔아놓은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민효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낡고 지저분한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깨끗해졌다. 공연장을 지하로 옮기고 나무를 바른 건물 내벽을 콘크리트로 교체하는 작업 끝에 K클럽은 21세기적인 모습으로 새롭게 탈바꿈한 것이다.

땀과 열기에 젖은 공연장으로 들어온 민효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매우 어린 학생들임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 또래의 남녀들도 적지 않았고, 간간히 매우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관객들이었다. 민효는 자신이 K클럽에 4년만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그때는 나도 확실히 어리다고 말해도 될 만한 나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서글퍼지는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강인의 목소리가 공연장에 울려퍼지기 시작했을 때 민효는 자신이 생각보다 냉정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4년 전 그때와 비교해 볼 때 여전히 똑같은 건 뭐고 달라진 건 뭘까. 여전히 나는 강인을 사랑하고, 록 음악을 싫어한다. 단지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다는 그 유일한 변화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바꾸어 놓았다. 흥분하고, 가슴을 떨고, 슬퍼하고, 치솟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쩔쩔매던 나는 사라졌다. 나만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를 여러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제는 화를 내지 않는다. 그 목소리가 향하는 소실점이 내가 아니라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니 쓰러질 이유도 없지 않은가.

민효의 주위에 포진한 사람들은 온통 키가 큰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긴 팔을 저마다 높이 뻗쳐 올리며 풀쩍풀쩍 뛰고 있어 그녀가 선 자리에서는 무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무대 위에 선 강인의 모습 역시 보일 리 없었다. 민효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더 편했다. 임신했었다는 내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고 집을 나간 후로는 내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다. 네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잖아? 너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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