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20
“그렇지 않아요.”
강윤은 자신의 품 속으로 감기듯 안겨드는 민효를 얼떨결에 떨쳐냈다. 진심으로 떨쳐내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탓이었다. 민효는 상처입은 눈으로 강윤을 쳐다보았고 그는 다음 순간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놀란 나머지 민효를 다시 자신의 팔 안으로 끌어당겼다.
“너.........”
그녀의 눈을 본 강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크고 검은 눈동자가 본래의 검은 빛을 잃고 흐릿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새까만 동공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 그 눈은 간혹 잡지에서 나오는 백인 모델들의 눈을 연상케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홍채 탈색이 일어났다. 시신경마저 그대로 비쳐 보일 듯 투명해진 눈동자는 충격적이었지만 동시에 매력적이었다. 그는 전에도 이와 같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이 눈은 민효의 눈이 아니었다.
민효는 입술을 앙다문 채 강윤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녀는 저런 웃음을 짓는 법이 없다. 어떤 기억이 강윤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번뜩였다. 그는 난폭한 손길로 민효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을 펼쳤다.
“역시.”
그녀의 손바닥에 다 나이디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너였구나.”
“이제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군요.”
“어째서 다시 나타난 거지? 언제까지 얘 몸에 머무를 거야?”
“이제 멀지 않았어요.”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는 탈색된 채 까만 동공을 한층 선명하게 보이도록 에워싸고 있었다.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이 몸은 그 남자, 당신 형의 목소리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요.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 그 남자가 피를 토하는 걸 봤다면 민효는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도 못했을 거예요. 하기야 그 위치에서는 그 남자가 그렇게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말이죠.”
강윤은 슬슬 강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옆에 진호와 용환과 헌수가 있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미래가 암담하게 다가왔다. 강인에게 있어서 음악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 질문에는 대답조차 할 수 없다. 차라리 그보다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자, 분명한 김민효의 몸뚱아리임에도 불구하고 김민효라고 할 수 없는 이 여자가 더 걱정되었다.
“네 눈은 어떻게 된 거야? 지난번에는 이렇지 않았어.”
“날 김민효가 아닌 다 나이디로 봐 줘서 기뻐요.”
“네 눈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이게 바로 내가 김민효가 아니라는 증거죠. 다른 의미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는 강윤을 잡아끌었다. 그제서야 강윤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를 깨닫고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어.”
“아까 당신이 그랬죠. 당신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그건 틀린 말이에요.”
“무슨 뜻이야?”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
그녀의 말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김민효가 아닌 다 나이디였기 때문이다. 다 나이디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그녀(민효)에게 그 주사위를 빌려 주도록 했어요. 그 주사위가 당신과 그녀의 손을 떠나 있으면 내가 당신을 떠나는 시간이 늦춰질 테니까.”
강윤이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자 다 나이디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과 이 여자, 내가 가진 그 주사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서로에게 기억을 전달할 수 있더군요. 어떻게 된 거죠?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런 초능력을 소유하게 된 거죠? 난 모르겠어요.”
“그런 거 없어.”
“있어요. 당신들 둘은 먼 곳에 있어도 서로의 기억을 전달할 수 있어요.”
“그런 건 나도 몰라. 그보다 너, 제발 사라져 줘. 네가 민효를 괴롭히고 있지?”
“그렇지 않아요.”
“K클럽에서 그애가 아파하던 게 너 때문이 아니란 말이야?”
사실 그것은 강윤의 본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민효가 그처럼 괴로워했던 것이 강인이 아닌 다 나이디의 탓이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다 나이디는 놀랍게도 그의 마음을 알아챘다.
“그녀가 아팠던 건 아까도 말했지만 그녀가 당신 형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해서예요. 그의 목소리가 아주 많이 망가졌다는 걸 그녀가 몸으로 느끼는 거죠. 게다가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아프게 하는 힘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이유가 있죠.”
“민효가 인이를 사랑해서?”
그렇게 되묻는 강윤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아니. 당신이 민효를 사랑해서.”
강윤은 자신도 모르게 나이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의 심장병, 완전히 나은 게 아니죠? 당신이 아파할 때의 그 기억. 아주 어릴 때 그녀가 당신의 그 흉통을 받아서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걸요. 나는 단지 기억만 복사할 뿐이지만 당신은 그녀에게 당신의 감정과 당신의 신경계에 미치는 고통까지 옮겼어요. 아까 그녀가 K클럽에서 느낀 고통이 당신이 아플 때의 그 고통과 똑같다는 걸 몰랐죠? 당신의 가슴을 틀어쥐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그녀가 그처럼 심한 호흡곤란으로 괴로워했다는 걸 몰랐어요?”
“시끄러워!”
“당신 형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그 흉통을 불렀어요. 당신들 참 이상한 관계로군요.”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야.”
강윤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야 한다는 생각을 잊은 채 무작정 걸었다. 한참을 걷던 그는 문득 다 나이디가 자신을 따라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서둘러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다 나이디는 버스 정류장에 앉은 채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봐.”
민효, 아니 다 나이디는 일어서서 강윤을 돌아보았다. 순간 강윤은 더욱 놀랐다. 그녀의 눈에서 핏빛의 가느다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피였다. 강윤은 나오던 숨을 안으로 삼켰다. 어이가 없군. 눈동자 탈색에 이제는 피눈물까지!
“미안해요.”
다 나이디는 황급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어깨 위로 후둑 하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강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내리려는 참이었다. 이미 하늘은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져 있었지만 가로등 불빛에 비친 민효의 얼굴은 오히려 유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일단 비부터 피하자.”
강윤은 그녀를 데리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던 그의 눈에 유리문이 열린 pc방의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간판 불이 꺼져 있었지만 문이 열려 있었던 데가가 계단참의 불이 꺼지지 않고 있어 잠시 비를 피하기에는 적당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미 굵어진 빗줄기를 막지 못한 탓에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젖어 있었다.
민효의 정수리 위로 잔머리가 보푸라기마냥 일어났다. 그 위에 살짝 얹힌 물방울들이 구슬처럼 빛났다. 강윤은 온 몸을 끈적하게 적시는 땀 때문에 옷이 몸에 달라붙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는 부드럽고 규칙적인 타악기 소리처럼 두 사람의 귀를 자극했다.
주위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이따금 오고 가는 차들의 타이어가 빗물을 튕기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만이 들려올 뿐 주위는 고요했다. 강윤은 앞머리에 묻은 빗물을 털어냈다. 그는 자신과 민효, 아니 다 나이디를 둘러싼 주위의 공기가 바깥의 공기와는 다르게 생성되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물 속에 들어온 듯 육중해진 그 공기는 부드럽고 아늑한 공기였다. 보이지 않는 따뜻한 가슴 속에 안긴 듯 포근한 공기였다.
여느 때라면, 로맨틱하다고 해도 좋을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에 대해 강윤은 일말의 당혹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혹은 늘 그랬듯이 끝내 자신의 손을 잡지 않은 민효에 대한 원망을 어떤 형태로든 토로하려고 시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선 그는 더 이상 민효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나는 질릴 만큼 나를 괴롭혔어. 게다가 이 여자는......그는 어이없어하며 민효를 잠깐 돌아보았다. 여전히 탈색된 눈동자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는 철제 난간에 기대에 있는 그 모습은 김민효가 아닌 다 나이디라는 사실 또한 분명했다. 강윤은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뭐가요?”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전혀 놀랍지 않다. 내가 겪은 참담함에 비하면, 그깟 한두 가지 초현실적인 현상들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은 내가 겪은 절망이 보잘것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나는 세상에 대해 놀라지 않을 테다. 자신의 등 뒤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강윤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내가 싫어요?”
싫은 건 아니다. 그러나 너는 민효가 아니잖아.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이해하니까. 그 여자는, 당신한테 되돌아올 거예요.”
그제서야 강윤은 몸을 돌려 자신의 등 뒤에 선 가냘픈 실루엣을 확인할 용기가 생겼다. 민효, 아니 다 나이디의 얼굴을 타고 흐르던 피눈물은 눈 아래에서 뺨에 걸쳐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말라붙어 있었다. 이제 알겠어. 왜 네가 민효의 몸과 인격을 빌려야 했는지를.
“네가, 미래를 볼 수 있어?”
“아니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어요.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당신한테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서로 떨어져서 살 수 없는 관계니까.”
강윤은 입을 벌려 짧고 답답한 한숨을 토했다.
“너는 그녀가 아니지.”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녀가 되었는데도 나한테 이렇게 냉담한 거죠?”
“너는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사람이 아닌 내가 사람의 마음으로 사랑을 알았으니 말이에요.”
립스틱이라도 발랐는지 민효의 입술에 여느 때보다 진한 핏빛이 고여 있었다. 강윤은 무심결에 손을 뻗어 눈물이 말라붙은 그녀의 눈 주위를 한 손으로 닦아냈다. 왼쪽 뺨을 닦아낸 후 그 다음에는 오른쪽 뺨을 닦았다. 이미 말라버린 핏자국은 잘 지워지지 않았지만 강윤은 몇 번이나 그녀의 뺨을 손 끝으로 문질렀다.
“잘 지워지지 않잖아? ”
다 나이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그렇지만, 돌발적인 충동은 엉뚱한 상황에서 생겨나기 마련인데, 그 순간 강윤의 가슴 속에 불붙은 충동도 그러한 것이었다. 그 충동은 아주 즉각적이고도 단순명료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그가 느닷없이 고개를 구부려 자신의 입술을 다 나이디의 입술에 가져다 댔을 때 다 나이디는 저항하지 않고 그의 팔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가 사납게 그녀의 몸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전, 민효는 다음과 같은 영화를 본 적이 있다―다소 퇴폐적이지만 유쾌한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 길거리를 걸어다니던 아름다운 여자는 등 뒤에서 얼굴에 가면을 쓴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어두운 골목 구석에서 그에게 강간을 당하고 강간은 곧 화간으로 바뀐다. 화간이 끝난 후 남자는 얼굴에 쓴 가면을 벗고 그제서야 여자는 그가 자신을 놀라게 하려던 남자의 트릭이었음을 알게 된다―그것은,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었다.
어쩌면 오늘, 이 순간의 상황은 그러한 웃지 못할 사고의 또 다른 재현일지도 몰랐다. 기이하게도, 한여름 유리창에 낀 성에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울려퍼지는 빗소리는 재현의 선상에서 제외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