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21
“장유경이 죽었어.”
죽은 듯이 누워 있던 강인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이내 힘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그 여자가 죽건 말건 알 게 뭐야.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강인은 그녀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오래 전 민효가 자신에게 들려준 푸시킨의 시 한 구절을 기억해냈다.
승리는 원한을 가져오고, 패한 자는 괴로워 누워 있다.
네가 이겼어. 그래서 원한에 찬 누군가가 널 죽인 걸까. 잘 봐. 여기에 패한 내가 괴롭게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마비되고 싶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로.
밖에서 진호와 용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파묻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강인의 귀에는 신기하리만치 또렷이 들려왔다.
“아직도 전화 안 받아?”
“아무래도 집에 아무도 없는 모양이야.”
“큰일인데. 일단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거 아냐?”
“본인이 병원행을 거부하는데 어쩌겠어. 일단 놔둬. 그나저나 벌써 경찰에서 조사를 나오지는 않겠지?”
“너 정말 경찰이 조사를 하러 올 거라고 생각해?”
“아니기를 바라지만 내 느낌은 그래.”
탈색된 눈동자에서 배어나오던 피가 멎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밤색 눈동자의 민효가 깨끗하고 흰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강윤은 숨을 몰아쉬며 아연한 심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정말이야.”
민효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피가 묻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글자 ‘다 나이디’는 사라지고 없었다.
“너는 미안할 게 없어. 내가 또 내가 아니었던 모양이지.”
민효의 숨소리는 낮고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금 전의 격전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틀림없는 민효였다. 다 나이디가 아니었다. 생각도 못한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의식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때때로 다 나이디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강윤은 그만 허탈해져서 그녀로부터 떨어진 채 그녀의 옆 벽에 기대어 섰다.
“알고 있었어?”
“뭘 말이야?”
“네가 가끔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민효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도 애매모호한 의혹에 빠져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어.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어. 너는 아마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나는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건 내가 아니야. 나는 없어. 나는 다른 사람이야. 라고 끊임없이 말하면서 자기 최면을 거는 버릇이 있었어. 그러면 정말로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거야. 사춘기 이후로는 그런 버릇은 사라졌지만, 요즘 들어서 다시 시작되었어. 이제는 거울이 없이도 그런 최면이 걸려. 그것도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이야. 그리고 없어진 내 존재 대신 다른 의식이 들어와서 내 몸뚱이를 놀려도 난 저항할 수가 없어. 그리고 그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했어. 하지만 이번만은 알겠어. 네가 나와, 아니 내가 너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러면, 넌 네가 아닌 그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알아. 다 나이디야.”
민효의 뺨 위로 핏자국이 옅게 번져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납빛을 띠고 있었다. 강윤은 진심으로 사죄하는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괜찮아. 이미 처음이 아니니까. 놀랍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나는.......인이를 걱정하고 있어. 왜 이런 느낌이 들까? 인이에게 나쁜 일이 생긴 것 같아. 집에 돌아가야겠어. 인이가 집에 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잠깐만.”
강윤은 유리문 밖으로 나가려는 민효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지금 이후로는, 아무 말도 안하는 거야? 알겠지? 오늘 일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표정으로 민효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