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Ⅱ-22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22



두 사람은 말없이 거리를 걸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약속한 듯 두 사람은 버스에 올랐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평행선을 유지하며 걸었다. 이윽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대문 앞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검은 두 개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강인이라고 생각한 민효는 깜짝 놀랐으나 이내 그 두 사람이 실루엣이 모두 강인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앞에 도착한 강윤은 자신도 모르게 한 팔을 뻗어 민효를 막으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이 댁에 사십니까? 이 댁이 강인 군이 거주하는 집이 맞나요?”

“맞습니다만.”

“실례지만 강인 군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전 같으면 도대체 당신들이 누구냐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그이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동생입니다. 무슨 일로 찾아 오셨는지요?”

한 사람이 경찰 수첩을 꺼내 내밀었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장유경 씨 아시죠?”

“장유경?”

강윤은 그 이름을 선뜻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민효는 금세 그 이름을 알아들었다. 하기야 잊을 수도 없는 이름이었다.

“알아요.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장유경 씨가 살해당했습니다.”

“네에?”

강윤과 민효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사이좋은 커플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형사들 역시 자신들도 마땅히 해야 할 동작을 취한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본 후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강인 군이 유력한 살해 피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상황이라.......실례지만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겁니까?”

“아니오......네. 저, 인이는 집에 없어요. 아마 아직 K클럽에 있거나......”

강윤이 민효를 툭 쳤지만 그것은 별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형사는 강윤의 제스추어가 뜻하는 바를 알아챘는지 대뜸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피의자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 이르고, 또 저희도 구속영장 없이 체포할 수는 없으니까요. 단지 몇 가지 여쭤봐야 할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최소한의 협조를 부탁드리는 것뿐입니다. 강인 군이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십니까?”

“아마 내일 아침쯤에는 집에 들어올 겁니다. 집에 돌아오는 대로 같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경찰서에 계신가요?”

“저희는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

예상 외로 완강한 형사들의 태도에 두 사람은 약간 놀랐다.

“내일 아침에 집에 오는 건 확실합니까?”

아닌게아니라 강인이 내일 아침에 집에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미 다른 형사들에게 붙잡혀 경찰서에 끌려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때 이미 온몸에 비를 맞은 민효가 두 형사를 향해 웃으며 제의했다.

“제가 인이한테 연락을 취해 보도록 하죠.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겠어요? ”

두 형사는 머뭇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말없이 민효를 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형사들이었다. 비록 곁에 사내를 달고 있긴 하나 아름다운 아가씨의 제의를 거절하고픈 마음은 별로 없어 보였다. 민효는 열쇠로 문을 열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다 나이디는 2층에 있는 민효의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민효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놓고 급히 옷을 갈아입은 후 에어컨을 가동했다. 후텁지근한 여름의 열기가 비로 인한 습기와 뒤섞여 온 집안에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사들은 냉커피가 자신들의 앞에 놓이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다소 느긋해진 표정이었다. 그들은 끈적한 습기와 더위를 참아가며 몇 시간이나 강 박사의 집 앞에 죽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말씀 좀 해 주세요.”

느닷없이 자신들의 앞에 마주앉은 민효의 제의에 형사들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왜 인이가 피의자로 지목되었나요?”

한편, 강윤은 갈아입을 옷이 보이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강인의 낡은 티셔츠와 반바지를 걸쳐 입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저 망할 놈의 형사들이 뭔가 착각을 한 것이 아니면 아주 그럴듯한 오해를 한 것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난데없는 경찰의 출현이 그에게 걱정이나 두려움 따위를 가져올 리 만무했다. 그러나 경찰의 설명은 의외로 설득력이 있었다.

“장유경 씨는 6월 16일에 피살되었습니다. 레코드 회사 관계자가 그녀에게 급한 용건이 생겨 연락을 시도했으나 잘 되지 않자 아파트를 직접 찾아갔다고 하더군요. 워낙 보안장치가 정밀하게 되어 있어 별 수 없이 사다리차를 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평소 타고 다니던 차도 주차장에 그대로 있었으니 나갔을 리도 없지 않느냐고 나중에 그 관계자가 말했는데 과연 그렇더군요.”

“어떻게 죽었나요?”

“칼에 찔렸습니다. 가슴과 목을 각기 두 차례씩.”

민효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형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젊은 아가씨가 그런 참혹한 광경에 몸서리치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죠’라는 문장을 요약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형사가 말했다.

“장유경 씨가 거주하던 아파트는 워낙 유명한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보안이 상당히 철저한 편입니다. 당연히 용의자가 CCTV에 찍혔겠죠. 가장 마지막으로 찍힌 사람이 강인 군이었습니다. 이제 왜 저희가 강인 군을 피의자로 지목했는지 아시겠죠? ”

“자살일 가능성은 없나요?”

“없습니다. 우선 유서가 발견되지도 않았고, 살해당한 장유경 씨 몸에서 폭행당한 흔적이 발견되었더군요. 그리고 문제의 칼이 부엌 싱크대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자신을 칼로 찔러 자살한 사람이 싱크대까지 걸어가 칼을 집어넣고 다시 돌아와 쓰러진다는 것도 좀 웃기지 않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그 아파트의 경비원 말로는 각 현관문에 달린 열쇠 이외에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때 필요한 비밀번호를 지정해 두고 있어서 그 번호를 모르면 들어갈 수 없는 장치를 해 두었는데 현재로서는 장유경 씨의 지인들 중 그 번호를 아는 사람으로는 강인 군이 유일했다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경비원이 직접 인터폰으로 유경양과 연락해서 확인을 한 후 그 장치를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들어가야만 했다고 하니까요. ”

민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쯤 되면 강인이 범인이 아니라 해도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릴 판이었다. 경찰의 말을 주의깊게 듣던 강윤은 별안간 일어나 전화 쪽으로 다가갔다. 그도 민효도 강인이 사람을 죽였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강인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어떻게? 도망치도록 할까? 아니면 경찰에 서둘러 출두하도록 할까? 강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동안 민효는 분명 경찰이 놓친 알리바이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끊임없이 손가락 끝을 물어뜯기만 했다.

“지금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마음 굳게 가지셔야 합니다. 보아하니 아마도 여동생? 관계가 그렇게 되시나요?”

“그렇습니다.”

실상은 아니지만 그렇게 대답해두는 편이 나았다.

“아무튼 마음 굳게 먹으십시오. 지금으로서는 달리 생각할 길이.......”

“있어요.”

“네?”

“달리 생각할 길이 있다구요. 아까 장유경씨가 피살된 날짜가 언제라고 말씀하셨죠?”

“6월 16일요. ”

“그럴 리 없어요. 뭔가 착오가 있으셨던 거겠죠.”

“16일 맞습니다. 그날 저녁 8시에 발견되었습니다. 살해시각은 그 전날인 15일로 추정되고요.”

“저는 17일날 장유경씨를 만났는데요?”

“네?”

아연실색한 형사들이 민효를 빤히 쳐다보았다. 심지어는 멀찍이서 이야기를 듣던 강윤조차도 놀라 민효를 쳐다보았다. 졸지에 세 남자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민효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확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형사들 중 하나가 민효에게 질문했다.

“확실한 겁니까?”

“네.”

“16일이 토요일이었고 17일이 일요일이었죠?”

“네. 17일에 서울 지하철 운행중단 사고 뉴스가 나었었죠? 농협 2인조 은행강도 범인 검거 뉴스도 그날 나왔었구요. 못 믿겠으면 확인해 주셔도 좋아요. 일요일이라 우체국이 문을 닫았던 것까지도 기억하니까요. 아침나절에 일요일인 줄 모르고 우체국까지 다녀왔는데 문을 닫았기에 투덜거리면서 집에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장유경 씨가 왔더라고요.”

“요즘 우체국은 토요일에도 문을 닫는답니다.”

“그래도 그 날은 일요일이었어요.”

“좋습니다. 여기에 찾아왔단 말입니까?”

“네.”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그 말씀은 제가 17일날 장유경 씨를 만났다는 걸 인정하시는 거죠?”

형사들은 말문이 막혔다. 이윽고 한 형사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증거가 없쟎습니까.”

“아하, 증거.”

민효는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툭 쳤다.

“하긴 증거가 없군요.”

듣고 있던 형사들은 별 미친 여자 다 보겠다는 얼굴이었다. 민효는 자신이 장유경을 만났던 날의 일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날 운전하기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17일날 장유경 씨를 태웠던 택시기사를 찾으면 예상 밖의 증인이 생길 수도 있겠군요.”

형사들은 갈수록 점입가경이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때 강윤의 옆에 있던 전화벨이 울렸다. 강윤이 냉큼 전화를 받았고 형사들은 긴장한 듯 어깨를 추스렸다. 민효는 얼른 강윤 곁으로 달려갔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진호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병원이 어쩌고 하는 말 이외에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강윤은 민효를 피해 옆으로 슬쩍 비켜서며 알았다고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뭐래?”

강윤은 형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최소한 인이가 도망갈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네요. 지금 병원으로 옮길 거랍니다. 성모병원으로 옮길 거라는데요.”

형사들은 인사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황급히 현관을 뛰쳐나갔다. 민효가 대답했다.

“진짜야? 성모병원으로 옮길 거라는 게?”

“물론 아니지. 아빠 병원으로 옮길 거래. 최 박사님 계신 병원 말이야.”

‘아빠 병원’이란 강인과 강윤의 아버지 강태규 박사가 출국 이전에 근무했던 M병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빠가 근무하시는 병원’이라는 말을 줄여 ‘아빠 병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족들 사이에서 버릇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옮긴대? 어디가 아프대?”

“일단 이비인후과 검사를 받아야겠지. 심하면 기관지 혹은 폐 검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입에서 피를 토하던 강인의 모습을 얼핏 떠올리며 강윤이 대답했다.

“인이가 병원에 안 가려고 떼를 써서 이용환하고 칠득이 형이 그 녀석을 쥐어 팼다는데?”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자못 심각해진 민효의 표정이 강윤에게는 우습고도 애잔하게 보였다.

“우리도 가 봐야지. 어쨌든, 형사들이 내 잔꾀에 그렇게 오랫동안 속아 주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아마 금방 다시 아빠 병원으로 쫓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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