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Ⅱ-23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23



응급실에서 입원실로 옮겨진 강인은 사람들과의 대면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를 병원으로 옮긴 다른 친구들은 모두 돌아가고 진호, 용환, 칠득이 그리고 헌수만이 남았다. 그 상황에서 헌수마저 부모의 부름을 받고 급히 돌아감에 따라 남은 사람은 그저 입원실 밖에서 강인의 고집이 꺾이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밀 검사는 아침이나 되어야 할 수 있겠지만, 아침이 되면 언제 경찰로부터 호출이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진호는 맥이 빠지는 표정으로 오늘 낮부터 자신이 맡아 가지고 있던 강인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밧데리가 다 닳아버린 탓에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복도 저 쪽에서부터 걸어오는 강윤과 민효가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서두르는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진호는 그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그들에게로 뛰어갔지만 용환은 가벼운 코웃음을 치며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별다른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지금 그에게 닥친 상황이 한결같이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인이는 어디에 있어?”

진호는 굳게 닫힌 입원실의 문을 가리켰다.

“아무도 안 만나려고 해. 아까 의사가 다녀갔는데 정확한 결과는 내일 CT촬영을 해 봐야 알 거라는 거야. ”

“미친 놈.”

강윤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 참. 너, 장유경 알지? 그 여자 죽었어. 알고 있어?”

“알아. 형사가 집에 왔었어.”

일시에 민효를 제외한 사람들의 눈이 강윤에게로 쏠렸다.

“형사가 뭐라고 해? 역시 인이가 범인이래?”

“네 생각에는 인이가 범인 같냐?”

“그게 아니라 뭐라고 말했는지를 묻고 있잖아.”

“유력한 피의자 후보시란다.”

“말도 안 돼.”

“더 말도 안 되는 얘기 해 주랴? 장유경은 토요일에 죽었는데, 일요일에 민효를 찾아왔었대.”

사내들의 눈길이 일시에 그 자리에 선 유일한 여자에게 쏠렸다. 민효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아. 그러나 용환이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믿어. 믿고말고. 그 불여우라면, 토요일에 죽었다가 일요일에 멀쩡하게 살아나는 게 가능하지.”

이미 밤이 깊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호만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병원에 잠시 들른 은하와 밤참이라도 먹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을 뿐이었다. 칠득이는 복도에 비치해 둔 긴 휴게용 의자에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민효는 이따금 강인이 홀로 누워 있는 병실을 쳐다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용환이 어디에선가 가져온 녹차를 내밀었을 때 종이컵을 받아들며 고맙다고 한 것이 전부였다.

도대체 인이는 혼자 저렇게 누워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때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용환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아까 응급실에서, 혼자 있고 싶다고 할 때, 이상한 말을 하더군.”

“이상한 말?”

“음........뭐라고 했더라? 아. 생각났다. 승자는 한이 깊고 패자는........”

민효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승리는 원한을 가져오고, 패한 자는 괴로워 누워 있다.”

“아, 그래 맞아!”

“푸시킨의 시야. 내가 가르쳐 준 거지.”

그 말을 들은 강윤은 일어나 자리를 떠 버렸다. 이로서 그 자리에는 용환과 민효만 남은 셈이었다. 용환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벙글거리며 민효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민효는 약간 머쓱해져서 입을 열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니에요.”

“그러면 왜?”

“너무 예뻐서.”

그 말을 들은 민효는 그를 흘겨보았지만, 실상 용환이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용환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민효에게 내밀었다.

“아! 이거, 잊지 않았네.”

“잘 썼으니 돌려줘야지.”

주사위를 받아든 순간 용환의 기억이 민효에게로 흘러들어갔지만 민효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용환은 이미 다 각오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엄청나게 치졸한 감정들을 느꼈지?”

“그렇네.”

그 순간 그들이 서로 존댓말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둘 다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대등하게 고상해지는 대신 대등하게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대화하는 셈이었다.

“설명이 필요하다면 설명해 줄 수 있어.”

“설명은 필요없어. 하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해도 괜찮아. 듣고 싶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용환은 잠시 입술을 깨문 채 맞은편 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솔직한 고해성사를 시작하려는 순간 그의 기분이 얼마나 심하게 헝클어졌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표정이었다. 민효는 주사위를 손끝으로 굴렸다. 그녀는 그의 모든 기억을 자신의 것처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치졸한 감정, 증오, 질투, 얄팍한 우월감, 그러한 모든 감정을 끌어안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모든 것을.

“그 사람은 나보다 네 살이나 위였어.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정확하게 관찰하는 능력이 없어서 그 사람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할 수는 없어. 단, 그 사람이 겉으로는 무척 반듯한 사람이었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야. 그리고 천재이기도 했지. 머지않은 미래에 맞이할 예정인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받은 그런 사람이었어.”

“그 사람을 무척 질투했구나.”

“맞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그 사람을 알게 되기 전까지 나는 질투라든가 시샘이라든가 하는 감정이 그저 하찮은 여자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었지. 물론, 그건 상대를 얕잡아보는 그런 천박한 질투와는 거리가 멀었어. 나는 그를 얕잡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지만 그건 쉽지 않았어. 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 중요한 건, 감히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나 말고는 없었다는 사실을 나도 그도 잘 알고 있었다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 패배의식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이야. ”

민효는 장유경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가 강인에게 어떤 중요한 존재가 될 것이 두려워서 그녀를 미워했었지. 그런 미움이 부질없어진 지금, 사망일보다 하루 늦게 나를 찾아왔던 그녀를 떠올린다. 아마도 귀신이었겠지. 귀신이었다면, 대체 왜 나를 찾아왔을까? 아마 죽기 전에 못다 한 말들을 하고 가고 싶어서였겠지.

용환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를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그 일념만으로 지난 날들을 보내 왔어. 내 20대 시절의 시작이 온통 그 한 가지 목적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냐. 어쩌면 누군가는 그가 내게 있어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어. 그는 내가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이었어. 하지만 그는 그걸 허용하지 않았어. 그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향하는 내 시선을 얼마든지 비웃으며 즐길 수 있었어. 맞아. 그는 내게 염장을 지르고는 그걸 즐거워하며 관찰하곤 했어. 그는 뛰어난 천재였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역겨운 나르시즘과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데 필요한 처세술의 대가였을 뿐이야. 나는 그처럼 점잔을 빼며 지고의 순수한 인간을 가장한 그가 사람들에게 웃어 보이는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았지. 나는 그가 사실은 존경할 가치도 질투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하지만 말야. 우리가 흔히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시샘할 때, 그 대상은 먼 곳에 있는 훌륭하고 위대한 인간이 아니잖아? 우리가 질투하는 대상은 우리들의 곁에 가까이 있는 단순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게 마련이야.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들 자신들과 비교될 수 있는 그런 대상 말이야. 그 역시 그런 대상에 불과했고, 나는 내가 어리석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내 감정을 끝까지 버릴 수가 없었어.......”

민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용당한 거야.”

“맞아. 나는 나 자신에게 이용당한 거야. 그를 향한 모든 악의가 향하는 방향이 사실은 그를 향하지 않고 내 안의 이기심을 겨냥하고 있었던 거야.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 악의를 쏜 거야. 나는 그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싫었어. 그가 화려해지면 화려해질수록 나는 점점 더 비참해져 갔어.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그를 미워하면서도 그를 인정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던 데 비해 그는 항상 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이야. 하지만 그는, 나라는 인간을 결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는 없었어. 그는 나보다 꼭 한 발짝씩 앞서 가고 있었을 뿐이고, 자신이 긴장을 늦추지 않는 어느 순간 내가 그보다 뒤쳐져 있던 한 발짝을 따라잡게 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거지.”

그 기억이 그대로 민효에게 전해져 왔다. 그것은 아프다기보다는 쓸쓸한 기억들이었다. 어떤 종류의 강렬한 적의는 시간이 지나면 매우 추한 빛깔로 퇴색된다. 그 흔적이 얼마나 어리석은 잔재로 남는지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마침내 그를 이길 수 있는 날이 왔어. 사람들이 앞다투어 나에게 몰려드는 순간이 눈 앞에 펼쳐진 거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보다 내가 더 훌륭하다고 격찬하는 날이 왔어. 나는 우쭐해진 기분으로 내게 쏟아지는 찬사를 들었어.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 내가 그에게 보내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 그 눈빛들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화가 치밀고 말았어. 도대체 타인의 찬사가 뭐란 말이야? 그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야? 그게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단 말이야? 나는 내 치졸한 질투심과 적개심을 떠받친 집착을 공통분모로 삼아 그와 나의 열정을 나누었어. 몫은 정확히 맞아 떨어져서 나는 그의 위에 올라섰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지만, 그 나머지는 뭐였지? 아첨과 아양에 히히덕거리는 속물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지. 그게 전부였어. 아니, 그보다 더 화가 나는 사실이 있었어. 나는 열정을 잃었어. 그를 이기겠다는 목표를 달성한 순간 나는 내 목표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내 목표를 달성하는 동안 나를 태웠던 집착의 파편들, 그 소중한 파편들을 잃었고 동시에 내 질투와 선망의 대상마저 잃었던 거지.”

어느 새 진호와 은하 커플이 다가와 용환의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있었지만 용환은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해.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애를 써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어. 단지 아주 끔찍한 죽음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래서 그걸 아는 사람에게 그 기억을 빌리러 간 거구나?”

민효는 반쯤 조롱하는 어조로 반문했지만 실상 그것은 조롱이 아니었다. 용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았어.”

만약 진호와 은하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용환의 고백은 여기에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하의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몽롱한 기억의 취기에서 깨웠다.

“그가 어떻게 죽었어?”

민효는 대답 대신 주사위를 진호에게 건넸다. 주사위를 받아든 진호는 이맛살을 찌푸렸고, 잠시 주저하면서 그 주사위를 은하에게 건넸다. 은하는 주사위를 받아들자마자 대뜸 큰 소리를 질렀다.

“와우! 정말 기억이 그대로 복사되어 들어오는 주사위네? 그 사람, 정말 끔찍하게 죽었구나?”

“아니, 죽은 것도 끔찍하지만, 네가 그에게 품은 그 집착들이 더 끔찍해.”

진호의 말에 용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나 둘씩 헤쳐내야 했어, 겨우 비집고 들어가서 쓰러진 사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을 때 내가 느낀 기분, 그건 기억이 아니야. 그건 기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야.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감정과는 전혀 달라. 그런 애틋하고 가슴 저리는 감정이 아니야. 절대 아니지. 그 더러운 허탈감을 그런 아름다운 감정에 견주어서는 안 돼.”

“그를 만났던 걸 후회해?”

은하가 그 질문을 던졌을 때는 어느 새 강윤마저 용환의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누군가를 만났던 걸 후회한 적은 없어. 설령 그렇게 차에 치어 죽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해도, 나는 그와 만나게 되어 있었고 그걸 피할 수는 없었어. 나는 네게서 저 주사위를 빌려갔지만 내가 정작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건 저 주사위가 아니었어. 나는 다만 자극제가 필요했을 뿐이야.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성냥이든 라이터든 부싯돌이든 도구가 필요한 법이야. 난 그 도구를 원했던 거야. 저 주사위 덕분에 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걸 기억해냈지만 그가 죽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다는 걸 기억해내는 데는 저 주사위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어.”

“아직도 마음이 아파?”

“그럴 리 없지. 단지, 생각할 뿐이야. 막연하게 그를 떠올리기만 할 뿐이야......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만남이라는 건, 운명이라는 건 묘해. 운명은 추상적인 미로처럼 얽혀 있고, 거미줄처럼 기하학적으로 짜여 있어서, 만나서는 안 될 길에서 우릴 만나게 해.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거야.”

은하가 민효에게 주사위를 내밀었다. 그때 강인의 병실로부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뼈를 짓이길 때나 지를 법한, 오장육부를 뒤집는 비명 소리였다. 민효를 제외한 모두가 일어나 강인의 병실로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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