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33
“뭐야?”
권 형사의 날카로운 반문에 그의 부하인 곽 순경은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만 덧붙였다.
“진범이 자수했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나간 건 바로 저기.....”
그는 강인을 가리키려 했으나 정작 가리킨 방향은 엉뚱한 쪽이었다.
“CCTV에 착오가 있었는지......좌우지간 그 음악 한다는 친구가 마지막이 아니었어요. 틀림없습니다. ”
사건이 손쉽게 종결된 것은 경찰서를 위해서는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권 형사는 이번 사건의 허무한 해결이 아무래도 마뜩치 않았다. 저 맹꽁이 같기도 하고 능구렁이 같기도 한 청년을 놓아주기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범행 경위를 너무 정확하게 자백한데다 동기도 분명하고 시간과 장소도 일치한 걸요.”
진범은 장유경과 진짜 ‘내연의 관계’에 있었던 듯한 레코드 회사의 한 관계자였다. 평소부터 그녀와 일 문제로 뜻이 맞지 않아 다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스토커 기질이 있었는지 아름다운 장유경을 끈질기게 쫓아다녔다는 것이었다. 허무한 한숨을 내쉬는 권 형사에게 곽 순경은 잊지 않고 덧붙였다.
“그 왜, 김주연이라고 했나요? 살인사건 다음날 그 여자를 직접 만났다는, 그 이상한 증인요. 범인이 범행을 저지른 건 토요일인데, 일요일날 죽은 그 여자를 봤다는 증인이 둘이나 더 있어요.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합니까. 죽은 여자가 얼굴이 팔린 여자라 잘못 알아봤을 가능성도 적은데.”
“이봐.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자는 거야? 우리는 진범을 잡았잖아? 그러면 된 거야. 이제 그 사건 해결되었으면 지난 연쇄살인 수사나 다시 시작해!”
곽 순경은 평소와 달리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는 권 형사를 생뚱맞게 쳐다보았다. 매사에 호쾌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권 형사가 동료나 부하에게 이처럼 큰 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그러나 적어도 두 사람에게는 공통된 의혹의 분모가 하나 있었다.
새로 붙잡힌 진범은 한때 장유경과 사귄 사이였으며, 그녀와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몰래 그녀의 뒤를 밟던 스토커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평소 강인이 그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눈여겨 보아둔 그는 강인이 장유경의 아파트로 들어갈 때를 맞추어 그와 함께 현관의 자동문을 통과했다. 두 사람이 서로 모르는 사이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함께 탄 강인과 다른 층의 버튼을 누른 다른 층을 찾아가는 체하면서 CCTV 사각지대인 계단참에 숨어 있다가 강인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장유경의 집으로 들어갔다. 열쇠를 복사해 두었는지 장유경이 문을 열어주었는지 좌우지간 그는 저항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본래 장유경이 살던 아파트에서는 원칙적으로 각 호수별 현관 앞 통로에 CCTV를 설치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사생활 침해의 우려로 인해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1층의 현관과 로비에만 설치해 둔 것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이다. 나중에 현관 CCTV에 범행을 저지른 직후 빠져나가는 모습이 잡히면서 범행이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경찰의 추궁에 순순히 자수했다.
“아예 작정하고 저지른 범행 같습니다. 잡히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그다지 주도면밀하게 꾸미진 않았어요. 반은 운에 맡긴 것 같아요. ”
실제로 장유경을 죽인 범인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인은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경찰서에서 풀려나왔다. 물론 권형사나 다른 경찰들의 정중한 사과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