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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ul 06. 2022

36. 잊지 못할 힘찬 발걸음

칼마녀의 테마에세이

자존심을 있는 대로 구기는 날, 더없이 자신이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이 예외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게 마련인데, 바로 7,8년쯤 전 어느 날 내게도 그런 날이 찾아들었었다. 

그저 자존심이 상한 정도가 아닌,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참담해진 기분을 추슬러가며 억지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도중 창 밖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탄 택시에서 차선 하나 정도를 사이에 둔 인도를 따라 부지런히 걷고 있던 그 남자는 뒷모습으로만 봐서는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다리를 심하게 절뚝이고 있었다. 

마침 택시가 신호를 받아 멈추어 서는 통에, 싫어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 남자의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오래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절뚝이는 다리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힘차게, 씩씩하게, 활기차게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씩씩하고 힘찬 발걸음을 지켜보는 동안,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수치심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창피함으로 변했다. 멀쩡한 다리를 두고, 그깟 구겨진 자존심 하나를 추스리지 못하고 택시를 탄 나의 얄팍한 멘탈을 그가 호되게 질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를 두고 너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지금 여기서 이렇게 힘차게 걷는 날 보며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그날 이후,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지는 비참한 날이 찾아들 때면 어김없이 나는 그 절뚝발이 아저씨의 힘찬 발걸음을 떠올린다. 그럴 때면 호되게 야단을 맞은 기분이 들면서 다시 상처로 얼룩지고 멍든 마음을 다잡게 된다. 그러고 나면 어느 새 조금은 더 강해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온몸이 싸움터에서 얼룩진 흉터로 뒤덮인 늙은 백전노장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나를 꾸짖을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는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비웃을 수 없는, 그 절뚝거리는 다리로 걸었던 세상에서 가장 활기차고 씩씩했던 걸음걸이만으로도 그는 나를 열두 번도 더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책을 출간할 때, 작가는 책의 맨 앞에 그 책을 헌정하는 사람의 이름을 쓴다. 내 다음 책이 어떤 작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다음 책은 그 힘찬 발걸음을 내게 보여주었던 이름 모를, 먼발치에서 스쳐간 그 절름발이 아저씨에게 헌정하고 싶다. 뭐라고 쓰면 좋을까. 


-잊지 못할 힘찬 발걸음의 소유자였던 

그 먼 옛날의 절름발이 아저씨에게 


이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은 헌사가 될 수 있을까 싶다. 어쨌든 그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내 스승이 될 사람이니까, 책 한 권쯤은 충분히 바쳐도 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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