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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un 26. 2023

54. 비오는 날의 빨간 원피스

칼마녀의 테마에세이

비오는 날의 빨간 원피스

지금 가지고 있는 옷 중에는 빨간 원피스가 없다. 아쉬운 대로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illust by kalsavina

아마 2003년도쯤이었다고 기억한다.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하염없이 내리던 날. 부산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려고 기차를 탄 나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정작 내리는 비를 원망한 건 내가 아니라 같이 간 선배들이었다. 해가 쨍한 날 입었으면 얼마나 눈부시게 돋보였을 거냐며.


그때는 몰랐다.

비오는 날의 빨간 원피스가 내 인생 그 자체였을 줄은.


늘 뭔가가 아쉽고 뭔가가 부족하고 뭔가가 어긋나고.

이번에는 완벽했나 하고 일어서서 고개들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맞는. 그런 것. 그런 인생.


그로부터 이십년이 지난 오늘, 딱 그때처럼 추적이는 부슬비가 내린다. 기상청은 그 어느 해보다 긴 장마를 예고했다.

줄기차게 해가 내리쬐던 지난 스무 해의 여름들이 차례로 작별을 고한다. 그 여름들을 함께했던 낡고 초라한 옷들과도 작별을 고한 지 오래다. 낡고 해지면 보내줘야 하는 게 옷이고 추억이다. 물론 그때 그 빨간 원피스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서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알 수 없이.


아껴뒀던, 숨겨뒀던, 부담스럽던 그 모든 화사한 옷들을 다 꺼내본다. 비가 내리니까 이런 걸 입는 보람이 없다며 투덜댈 게 아니라, 비가 내리니까 내리는 비를 방패삼아 평소에 걸치지 못했던 옷들을 걸쳐보기로 한다. 좀 젖으면 어떤가. 흙탕물이 튀면 어떤가. 한번도 입어보지 못하고 장롱 속에서 썩히는 것에 비할 건가.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이겨내야 한다. 지지 말아야 한다. 그런 투지로 스스로를 불태우며,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가장 멋진 옷을 입어야 한다. 내리는 비만 막아주는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후광처럼 빛나는 내 슬픔도 가려줄 우산을 꼭 쓰고.


#비오는날의 #빨간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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