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부터의 도피

나를 위한 여행의 기록

by Um sinal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라는 말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소화 안 되서 싫다는 딸의 단백질 섭취를 걱정하신 부모님 덕에 투쁠 한우가 미국산 소고기보다 부드러워 입 안에서 녹아 없어질 지경으로 맛있다는 정도는 알지만, 나는, 놀 줄을 모른다.

학창시절엔 수능 1등급을 맞아 인서울!을 목표로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전교생을 자율학습 시키는 공부에 미친 학교에서 시간을 보냈고 비로소 그것을 이룬 뒤에는 잠시 목표 없이 어영부영 전공에 걸맞게 모니터링이라는 핑계 아래 영화 보고 까고 드라마 보고 까고 음악 듣고 책 보느라 밤을 샜지만 그건 노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미래를 위한 투자 - PD가 될 생각이었다. - 였으므로 내가 시방 놀고 있구나 라는 자각조차 없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인생 뜻대로 안 되는 법인 만큼 언론사 자기소개서에 한 줄 쓰려고 시작한 알바가 적당한 오해와 애매한 상황으로 흘러가면서 직업이 되는 바람에.. 돌이켜보니 확실하다. 인생 조지는 거 한 순간이야.


여튼 365일 중 340일정도는 일을 하기 때문에 쉬는 날이 생기면 병원 가야 해 뿌염 해야 해 종종거리며 돌아다니기나 하지 제대로 논다는 것의 정의조차 모르는 범생이. 그게 나다. 가장 잘 하는 일은 엉덩이에 뾰루지가 날 정도로 책상에 앉아있지만 정작 라디오 듣고 덕질하느라 공부는 안 하면서 제대로 놀지도 못 하는 어설픈. 그렇게 10년 넘게 일을 하다 문득 깨달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아.. 도망을 가자.

한국에 있으면 일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이 곳을 떠나자. 좋아. 가는거야. 근데 시간이 없어. 해서 계획을 세웠다. 휴일이 3일 정도면 일본, 일주일 가량이면 대만이나 홍콩쯤, 일주일 이상이면 방콕, 그보다 더 길면 미주나 유럽으로. 그러나 이미 조져버린 내 인생 갈 수 있는 곳은 끽해야 방콕이지 더 먼 곳은 좀처럼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직장인 - 특히 프리랜서가 그렇듯이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는 법. 한국에서 월세를 내면서 미국, 유럽의 무서운 물가를 보름 이상 감당할 정도의 돈을 모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나는 여권이 닳도록 짜잘짜잘한 동남아 여행이나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망가기 전 신이 나서 구글맵에 지도 찍고, 원노트에 일정 그리고, 가서 사진을 열심히 찍고, 그러고 나서 돌아오면 그게 끝이었다. 갔다. 가 중요하지 매번 갔다 와서는 없다. 심지어 작년에 다녀온 곳을 다시 가려고 뒤적거리고 있지만 여행 가기 전의 자료와 이 성이 저 성 같고 저 성이 아까 그 성같은 디지털 파일만이 핸드폰에 잔뜩 쌓여 있는 것이다.


해서. 이 곳에 여행의 기록을 남겨보기로 했다. 이건 오로지 나를 위한 기록이다. 한 번 여행을 가면 다시 그 나라를 찾았을 때 그 곳을 다시 가서 나만의 추억을 만드는 내 여행의 루틴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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