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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용 Feb 11. 2024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트랜스휴먼적 글쓰기

카피는 어떻게 쓸까? 광고 회사를 다룬 드라마 <대행사>의 1화는 이보영 배우가 담배 꽁초를 쌓아놓고, 머리를 싸매며 카피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고민하고 고뇌한 뒤 직접 손으로 써내는 것. 이것이 카피라이터들이 카피를 쓰는 그림의 클리셰다. 카피는 이렇게 쓰일까? 뭐 내가 20년차, 30년차도 아니고, 카피라이터도 그만 두었으니 카피라이팅에 관해서는 재미로만 들어주시길.


카피는 정말 ‘어떻게든’ 쓴다. 고 이인구 교수의 <카피 한 줄의 힘!>과 정철의 <카피책>을 보면 잘 정리 돼 있다. 맨 먼저 할 일은 브랜드나 제품만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나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 특성을, 만들어질 광고 컨셉이나 카피와 연결시킨다. 그 다음엔 요구된 미션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논리를 세운다. 경쟁 브랜드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차별점으로는 무엇을 강조할지도 생각해본다. 그렇게 컨셉과 카피를 같이 잡기도 하고, 컨셉만 잡기도 한다. 키메시지가 그대로 컨셉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중요한 건 핵심 키워드를 추출하고 정제하는 것이다.


핵심 키워드가 추출이 되면 이제, 노트를 펼치거나 워드 프로세서를 켠다. 카피를 쓰는 순간이다.  손으로 써보거나, 타이핑을 한다. 말장난을 치고, 대구를 만들고, 앞말을 맞추거나, 글자수를 맞춰 리듬을 살려본다. 동음이의어도 활용해본다. 때론 고객의 언어에서 따온다. 낯선 형태로도 단어를 조합해본다. 각운을 맞춰본다. 의성어나 의태어를 활용해 생동감을 더해본다. 단어를 더해 구조를 맞추거나, 아예 동사만 남기거나, 같은 단어를 반복해본다. 반복이나 나열을 활용해보기도 한다. 때론 브랜드 네임에서 따오기도 한다. 고객의 편익이 드러나게 하는 것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을 때 생길 위협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용하는 고객이 얼마나 현명한지를 칭찬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렇게 쓰면 뭐라도 나온다. 하지만 과연 이게 끝일까? 아니다. 이 과정 전후에 다른 광고들을 찾아보는 과정이 있다. 경쟁사들의 광고 카피들을 살펴보고, 최신 해외 광고들과 해외 유명 광고제에서 수상한 광고들도 찾아본다. 거기 나온 카피들을 그대로 메모장에 옮긴다. 때론 생성형AI인 챗GPT나 구글 바드, 국내 서비스인 뤼튼에도 카피를 써보라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종합해서, 가장 좋은 조합으로 카피를 내놓는다.


머리를 싸매고 손으로 노트에 카피를 쓰는 과정, 그 과정은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게 카피라이팅의 전부는 아니다. TV, 유튜브, SNS, 책 제목, 책 본문, 논문, 영화 제목, 영화 포스터, 간판, 인터넷 밈, 커뮤니티 게시물, 언어생성 AI까지 언어로 된 모든 것이 참고거리다. 거기서 따오고, 훔치고, 빼앗고, 인용하고, 복사하고, 전유하고, 모방하는 것, 이 또한 카피라이팅이다. 카피 쓰는 일이 이럴진대, 일반적인 글쓰기도 당연히 이렇게 해야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케네스 골드스미스는 <문예 비창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문학이 (그 범위와 표현의 잠재력이 무한함에도) 틀에 박혀 있다고 느낀다. 내가 보기에 문학은 되풀이해 같은 어조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고, 가장 좁은 영역에 자체를 국한하여,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우리 시대의 가장 생생하고 흥미로운 문화 담론에 참여할 수 없는 분야가 됐다.” 요는 우리가 글쓰기라는 행위를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펜으로 뭔가를 쓰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전통적인 이해 방식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개념으로만 ‘글쓰기’를 이해하는 것은 글쓰기를 너무 좁게 보는 것이다.


언어는 무한한 조합이 가능한 도구다. 하지만 그 조합엔 한계가 있다. 의미가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조합에 한계가 있다면, 내 ‘내면’의 언어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아니, 외부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말을 빌려와 자기 진실을 꺼내는 글쓰기, 즉 ‘내장을 꺼내는 글쓰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런 글쓰기에 진정한 재미가 있다고 했다. 언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한계 덕분에 우리는 자기만의 진실을 꺼낼 수 있다. 그 한계가 의미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언어의 조합이 내 내면을 적확하게 표현할지를 선별하는 게 중요하다. 그 선별된 언어가 우리의 내장이 된다. 하지만 육체의 내장과 달리, 우리가 언어로 꺼내놓을 ‘내장’은 꼭 나의 ‘내면’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다른 누군가가 책에, 유튜브에, 칼럼에, 기사에, 페이스북에, 블로그에, 브런치에 나의 내장을 꺼내놓았을 수 있다. 이것을 발견하고 포착해 나의 맥락 안에 위치시키는 것, 이것은 글쓰기가 아닌가? 아니, 이것도 글쓰기다. 트랜스휴먼적 글쓰기. 따오고, 훔치고, 빼앗고, 인용하고, 복사하고, 전유하고, 모방하는 글쓰기.


소설가 김영하는 글쓰기를 주제로 한 세바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글은 쓸 수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트랜스휴먼적 글쓰기의 관점에서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따오고, 훔치고, 빼앗고, 인용하고, 복사하고, 전유하고 모방하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바꿔 볼까. 영화 <기생충>으로 봉준호가 아카데미에서 트로피를 받았을 때, 그는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헌사를 바치며, 그에게 그의 말을 되돌려줬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역도 참이다.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가장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무언가가 우리의 내장일 수 있다. 그것을 포착하는 것, 이것 또한 글쓰기다. 진작에 도래했던 새로운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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