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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용 Feb 17. 2024

선택해야 할 건 영화가 아니라 극장

새로운 영화를 만나는 방법

“2005년 6월, 스물다섯 살의 나는 종로 씨네코아에서 홍상수의 <극장전>을 보며 영화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동시에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담배를 너무 피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장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내 몫의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흡연자이며 내가 너무 늙어/늦어버린 건 아닌지 고민하는 이십대 중반을 지나왔(거나 겪고 있)다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서평가 금정연의 에세이 <담배와 영화> 중 일부다. 이 글을 인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글에서 우리 인생에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뭘까? 글쓴이의 흡연 욕구? 아니다. 담배는 끊으면 된다. 나는 금연 캠페인이나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금연 캠페인이 더 훌륭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럼 중요한 건 뭘까? 이십대 중반에 마주해야 할 현실? 아니 글쓴이도 우리도 영화가 끝나든 안 끝나든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이십대 중반이든 삼십대 중반이든, 우리가 어떤 기분으로 극장에 들어갔든 간에, 영화가 끝나면, 극장 바깥에선 언제나 우리의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특별할 것 없다. 그러니까 다른 건 다 중요하지 않다.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그것은 홍상수의 <극장전> 같은 영화를 보려면, 종로의 씨네코아 같은 극장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스물다섯 살의 나는 롯데시네마/CGV/메가박스에서 홍상수의 <극장전>을 보며 영화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동시에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이제 종로에 씨네코아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둘러싼 대부분의 극장들은 CGV이거나 롯데시네마이거나 메가박스다. 정말 많지 않나. 나는 영화를 사랑한다. 극장도 사랑한다. 대한민국에, 서울에, CGV가, 롯데시네마가, 메가박스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기쁘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본 영화 다섯 편, 즉 <너와 나>, <사랑은 낙엽을 타고>, <나의 올드 오크>, <노 베어스>, <추락의 해부>는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중 어느 한 군데서도 보지 않았다. 이곳에선 거의 CJ ENM과 롯데엔터테인먼트, NEW, 쇼박스, 플러스엠에서 배급하는 영화들만 보여주니까…. 물론 이따금 다른 배급사의 영화를 상영할 때도 있다. 대체로 그 영화들은 아주 늦은 밤이나 아주 이른 아침에 상영된다. 그래서일까. 멀티플렉스 극장들에선, 거의 비슷한 자극과 거의 비슷한 오락만 매번 반복되는 듯 하다. 패턴화/공식화된 문법들을 반복하는 영화들. 슬프지만, 자극의 강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더 즐거워지진 않는다. 형식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가 위기라고 한다면, 그 핵심엔 권태가 있다. 매번 비슷한 오락, 매번 비슷한 유머, 매번 비슷한 신파가 강도만 높여서 반복된다. 봤던 걸 또 보고 또 보는 관객들은 지겹고 따분하다. 관객이 없어서 요즘 극장가에 활기가 없다는 건 두번째 문제다. 스크린 자체에 활기가 없다는 것, 그게 더욱 핵심적인 문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른다. 영화 관계자도 아니니까. 하지만 미스테리 아닌가. 스스로의 활기를 없애는 극장 상영 시스템이라니. 아마 자본의 논리인지 뭔지, 뭐 그런 걸로 운영되다 이런 거겠지. 허나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데, 지금의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대체로 우리에게 설렘을 주지 못 한다. 나는 상업 영화는 나쁘고 예술 영화는 좋다는 식의 얘길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2023년도에 롯데시네마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오펜하이머>, <거미집>과 <플라워 킬링 문>을 재밌게 봤고, <서울의 봄>도 그럭저럭 잘 봤다. 지금은 <듄 파트 2>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상업 영화들조차 주요 배급사의 작품이 아니라면 쉽게 만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라는 걸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있다. 영화가 단순한 오락과 여가 이상의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영화라는 예술을 보다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 이들은 영화를 통해, 보지 못 했던 것들을 보고, 만나지 못 했던 것들을 만나고자 한다. 그러니까 이들은 존재의 층위를, 높이고자 한다. 극장은 이런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런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굳이 극장에서 그런 경험을 해야 할까? 집에서 다운로드를 받아서나, OTT를 통해 영화를 보는 걸로 충분히 가능한 경험 아닌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자기 선택에 갇힐 위험이 있다. 알고리즘이라는 공포스러운 시스템 때문이다. 그것들은 나에게 ‘맞춰’ 준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껏 봐온 세상과 유사한 세상 안에서 돌고 돌게 된다. 다른 모험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능동적 선택이라고 믿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체계 안에 가두는 것, 우리가 발휘하는 능동성은 수동적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통해 내가 만나보지 않았던 세상을 만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영화’가 아니라 ‘극장’에 초점을 맞춰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영화를 보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조건, 이것을 바꿔보는 것이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어떤 소프트웨어를 쓰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하드웨어를 추천하는 격이니까. 하지만 지금 영화의 세계는 그런 세계다. 하드웨어를 바꿔야 소프트웨어를 바꾸거나 다양화할 수 있는 세계.


사실 이런 공간은 “예술영화관”이라고 구글에 검색만 해봐도 잘 소개되어 있다. 거의 서울에 몰려있는 게 문제일뿐… 다만 서울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런 델 엄청 많이 찾거나 잘 다니는 것은 아니다… 맨 먼저 서울시 노원구의 더숲 아트시네마라는 공간을 소개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곳이 생긴 이후론 다른 극장은 거의 가지 않았다. 이외에 가 본 곳으론 종로구에 있는 에무아트시네마가 있다. 모두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보기 힘든 예술영화, 독립영화, 다양성영화를 상영한다. 셀럽들이 GV를 자주 하는 씨네큐브도 있다. 이 외에도 서대문구의 라이카시네마라든가, 독립영화전용관인 인디스페이스, 아트나인,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 KOFA 도 있다. 시네마테크 극장들은 고전영화들을 모아서 상영하고, 특별한 컨셉의 기획전들을 꾸준히 하는 곳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극장 상영이 끝난 영화를 볼 수도 있다. 평생 볼 일 없었던 영화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위의 극장들 중에서 한 곳을 골라 영화를 한 편 봐보자. 영화 대신 극장을 먼저 고른 뒤 그 안에서 영화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2016년도에 광주를 여행하다가, 광주극장에 들어가, 당시 상영하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70년도 영화인 <순응자>를 본 일이 있다. 영화를 먼저 고른 게 아니라, 극장을 먼저 고르고 영화를 본 것이었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리스트에 나를 맡긴 것이다. 지금껏 해보지 않은 경험을 해보겠다는 마음, 낯선 무언가를 만나보겠다는 마음. 이 때 발휘한 수동성은 굉장히 능동적이다. 그리고 성공적이게도 나는 그 옛날의 이탈리아 영화를 통해 매우 낯선 무언가를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웬디 우드는 인간의 행동 패턴, 즉 습관을 결정하는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환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습관을 바꾸려면, 교정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행동이 유도되게끔 환경을 바꿔줘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대신 극장을 먼저 선택해보자고 말하는 이유다. 다른 것, 낯선 것, 새로운 것을 보면서 새로운 눈을 뜨려면, 새로운 환경이 갖춰진 곳으로 가야 한다. 물론 어떤 극장도 자본의 논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하지만 완전히 자본의 논리에’만’ 포섭된 극장에선 만날 수 없는 기쁨이 위에서 소개한 극장들엔 있다. 물론 어떤 뛰어난 상업영화들은 가장 엔터테인먼트적인 순간에 비로소 엔터테인먼트를 뛰어넘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화들의 가장 예술적인 순간은 극단의 엔터테인먼트적 쾌감을 뛰어넘는다. 시네필도, 영화광도 아니지만, 나는 위의 극장들에서 그런 기쁨들을 선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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