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문가들에게 적극적으로 영향 받기
영화는 혼자 볼 수도 있고 함께 볼 수도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 혼자 볼 때의 대표적인 장점은 자기 취향에 맞춰 영화를 고를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간대도 원하는 대로 맞출 수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를테면 극장에 같이 간 사람이 오늘 함께 볼 영화를 좋아할지, 팝콘을 먹어야 할지, 나초를 먹어야 할지, 콜라는 M사이즈를 시킬지, L 사이즈를 시킬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혼자 영화를 보면, 영화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만 연인이든 친구든, 누군가와 함께 볼 때의 장점도 상당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감상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까. 운이 좋다면, 2시간짜리 영화를 보고서 4시간 짜리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물론 영화를 함께 보려면, 부부가 아닌 이상, 우리는 시간 약속을 잡아야 한다. 자기 취향이 아닌 영화를 봐줘야 할 가능성도 생긴다. 물론 당신이 성격 파탄자라면, 그런 거 상관 없이 자기 취향만 고집하겠지만… 우리 그러지 말자….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무조건 함께 보기를 선택한다. 아니, 나는 거의 모든 영화를 ‘함께’ 본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너 혼자 극장 완전 잘 가잖아?”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장에 혼자 갔다 나오더라도, 함께 보는 방법이 다 있다. 여기에 엄청 대단한 비밀이 있는 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본 영화들에 대한 전문가들의 글을 읽는 것, 이게 혼자서도 함께 영화를 보는 방법이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해설 영상을 찾아보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말해놓고 보니, 정말 대단하지 않군….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영화평론가라곤 이동진 밖에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동진이 대중적으로 엄청나게 사랑 받나? 하면 생각보다 그렇지 않다고, 과감하게 주장하고 싶다. 솔직히 이동진이 별점 5점 준 영화라고 사람들이 좋아하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피한다. 살면서 이동진의 글을 읽는 사람도 잘 못 봤다. 무려 이동진인데도…. 그렇다면 다른 영화 전문가들의 글은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아니 실은 상상이 간다. 어쩌면 각종 영화 커뮤니티의 씨네필들은, 이런 상황에 개탄해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이 개탄하는 데에도 납득이 간다. 아주 조금만 공을 들여도, 영화 전문가들의 글이나 말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잡지가 다 사라졌다지만 여전히 씨네21은 살아있다. 그리고 씨네21에는 항상 개봉한 영화들의 비평이 실린다. 유튜브에는 무려 SK계열사에서 운영하는 채널에서 이동진의 영화 해설 영상이 올라온다. 그뿐인가. 인터넷 서점에선 정성일의 책도 살 수 있고, 김혜리의 책도 살 수 있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책도, 로저 에버트의 책도 번역되어 있다. 왓챠피디아에는 이름 모를 영화애호가들이 별점과 함께 장문의 글들을 남겨 놓는다. 매주 금요일엔 팟캐스트 매불쇼에서 시네마 지옥이라는 프로그램을 하는데 이건 정말 매우 웃김…. 요는 우리가 영화를 ‘함께’ 볼 방법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자기는 절대 영화 보고 나서 남의 리뷰나 비평 따위 보지 않는다’고 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상이 남에게 영향을 받으면 자기만의 온전한 감상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다른 이의 감상도 봐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진 않다. 나 또한 자기만의 관점으로 자기만의 감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특히 영화평론가들이나 영화 저널리스트 같은 전문가들에겐 어떤 영화에 대한 개성적인 사유와 남다른 통찰력이 필요한 거 아니겠나.
하지만 우리 같이, 혹은 나 같이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라면, 전문가들과 함께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당연하지만 이것이 감상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문가와 ‘함께’ 보면, 당연히 이들에게 우리는 영향을 받는다. 자기만의 온전한 감상을 지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기만의 온전한 감상이란 게 꼭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걸까? 안목이 일정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 했다면, 차라리 자기만의 온전한 감상 같은 건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자기만의 감상’을 지키겠다고 다른 이들, 특히 전문가들의 감상을 글이나 말로 접하지 않으면, 좋은 영화가 나와도 그 영화를 읽어내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만들어진 텍스트지만, 우리의 의식은 언어라는 텍스트로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우리는 영화를 혼자서 보면, 어떤 영화의 특정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합을 텍스트로서 제대로 읽어내지 못 한다. 영화를 통해 의미 있는 자기 고양이나 의식의 각성, 내적인 변화 같은 것도 일어나기 힘들다. 영화로 굳이 그런 걸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지만….
영화를 함께 본 경험의 대표적인 사례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영화 <너와 나>다. 나는 이 영화를 지인과 함께 봤다(‘실제’ 사람과 함께 봤다는 뜻이다). 러닝타임의 3 분의 2가 넘어갈 때쯤, 나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못 했다….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았다. 너무 슬픈 이야기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아이들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고, 지인과 의견을 모았다. 세월호를 이렇게 다룰 수도 있구나, 이렇게 애도를 할 수 있는 거구나 하며 감탄하기도 했다. 다음날, 나는 평소처럼 이 영화의 리뷰와 제작진 인터뷰, 그리고 비평들을 찾아보았다. 씨네21 소은성 기자의 리뷰를 읽었고, 세미 역의 박혜수 배우와 하은 역의 김시은 배우, 조현철 감독의 인터뷰를 읽었다. 김철홍 평론가의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와 송형국 평론가의 ‘참사의 시간, 영화의 시간’도 읽었다. 그 글들은 전날, 내가 영화를 보고 운 데에는 이유가 다 있었고, 심지어 의미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씨네21에서 하나의 비평을 더 읽게 되었는데, 김병규 평론가라는 분의 글이었다. 제목은 ‘<너와 나>와 한국 독립영화라는 문제’.
마지막으로 읽은 비평에 따르면, 이 영화는 “미학적으로 파산했다”. 이 영화의 화면은 “연출자가 가하는 과도한 치장으로 인해” 자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장면을 예로 든다. “밋밋한 화면 안에서 박제된 피사체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이 장면은 전혀 정교하게 조직되지 않아서 하나도 아름답지 않다. 심지어 추하다. 하지만 착시를 준다. 마치 무언가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는 착시.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보고 슬프네, 아름답네 하며 오열한 나는 뭐가 되는 거지…. 아니 뭐가 되든 되겠지.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마냥 오열했던 그 마음을,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이 비평에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지, 이 비평이 지적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왜 이 영화가 열광할 만한지 나는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감상 방식은, 분명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방식이다. ‘온전한 자기만의 감상’을 지키지 못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거지? 무엇이 문제인 거지?
나는 여기서 한 발짝 나아가보겠다. 사실 ‘자기 혼자만의 온전한 감상’이란 게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가 일종의 환상이고, 망상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혼자서 보겠다고, 아무리 강하게 마음 먹어도 우리는 혼자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껏 접해온 생각들, 우리가 이제껏 읽어온 텍스트들, 우리가 이제껏 봐온 영화들, 우리가 이제껏 해왔던 경험들, 이것들은 모두 타인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는 법이다. 즉, 당신을 영화와 만나게끔 하는, 당신의 시각과 청각 자체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혼자서 보겠다는 다짐’은 영화를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 시선으로 보는 방법을 포기하고, 굳이 빈곤한 시선과 감각으로 보겠다는 다짐이나 다름없다.
자, 그러니 영향 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어차피 영화는 혼자서 못 본다. 함께 봐야 한다. 누구와 함께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분명한 것은 어떤 이들과 함께 볼 때, 좋은 영화들은 우리를 새로운 의식의 세계로 가져다 놓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