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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하루 May 22. 2023

이런 기분인가

2023.05.22. 일기

 이따금씩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뉴스가 나온다. 살기 힘들어서, 학업이 힘들어서, 괴롭힘에 지쳐 등.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오늘 비슷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직업을 선택한 지 10년이 넘은 어느새 경력도 쌓인 사람이다. 지금이야 무엇이든 열정적이고 멋들어지게 처리하지만(스스로의 생각일 뿐이다), 십수 년 전 작고 소중했던 처음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무엇이든 눈치를 보기 바빴고, 윗사람들의 눈에 들려 아등바등 노력했다.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되지 못했던 그 시기에는 몇 번이고 나를 채찍질하고, 내가 조금 더 잘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나를 이성적인 호감으로 대했던 상사가 있다. 나이는 무려 20년 차이.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바보였던 걸까 아니면 어리숙했던 걸까? 10년이 더 된 지금 그때의 일을 되돌아보면 가물가물 하면서도 무서웠던 직장 내 분위기만 떠오른다. 그런 나를 방어하기 위해 상사와의 메시지를 보관해 두었고,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쳐다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그걸 보기 부끄러웠던 걸까? 아니면 아직 준비가 안되었던 걸까? 어쨌든 그건 내 판도라의 상자였다.


 오늘 오전까지는 괜찮았다. 평소와 같은 대화를 했고, 카톡 속에 이모티콘도 있으며 대화 분위기도 좋았다. 그런데 오후 2시가 넘은 시간, 아내의 문자가 심상치 않다. 분위기가 싸하며 느낌이 안 좋았다. 지속적으로 분위기 파악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무슨 연유로 분위기가 달라졌는지 감이 안 왔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퇴근하며 카풀하는 직장 동료가 1시간 내내 떠드는 이야기를 그저 네, 네 하며 받아 넘기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이 있는 층에 내리는 순간 아내가 보인다. 순간 반가우면서도 화가 울컥 난다. 집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무슨 일인지 한층 격양된 말투로 물으며 대화는 시작했다.


 우리 집 컴퓨터는 내가 맞추고 결혼한 거라 무엇이든 내 계정이 로그인되어있다. 구글에서부터 네이버, 카톡 등등. 지금까지는 전혀 안 그랬는데, 왜 오늘? 대체? 내 메일이 들어가 보고 싶었나 보다. 들어가서 그 옛날 케케묵은 내게 쓴 메일함 속 그 기록을 찾아 그 상사와의 카톡 내용을 보았고, 아내는 몹시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이제야 모든 일의 아귀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힘들게 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만감이 교차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모든 이야기를 했었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를 믿지 못해 결혼 전에 솔직하게 밝혔던 모든 일을 분명하게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당신의 불신, 내 메일을 들어가 나 조차도 쉽게 찾지 못한 그 메일을 뒤져서 발견해 낸 당신의 집념, 그리고 나를 믿고 싶어 물어보는 거라고 하며 쳐다보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그 대화가 이루어진 구체적인 상황을 알지 못한 채로 내게 믿음을 갈구하는 그녀의 눈물과 무거운 분위기는 나 스스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내용을 내가 다시 내 입에 담으며 나 스스로에게 2차 가해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모두 내 상황이었을 때, 가스라이팅을 받았다고 해서 그런 행동을 취할 리 없다. 당연하다. 사람은 모두 다르니까. 그러나 난 그랬다. 잘못했다. 잘못했고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않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살며 당신을 만나 결혼했다.

 그런데 당신에겐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많이 못 미더웠나 보다. 그거 말고도 여러 이야기를 더 물었다. 나는 대체 그녀에게 어떤 사람일까? 이 집에서 나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 오늘까지만 해도 다음 주의 우리 가족을 생각하며 싱글벙글했던 나는 더 이상 없다. 그저 발가벗겨진 내 존재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
 나도 그녀도 펑펑 울고서야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나도 그녀에게 실망이라는 말을 남기며 화장실에서 펑펑 울었다. 내 방에 돌아와 치욕스러운 그때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쳐다보기도 싫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연 대가는 참혹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집은 23층이다. 참으로 높디높은 층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겐 다음 주에 태어날 소중한 아기가 있다. 마침 오늘 비가 내렸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오늘의 이 일이 우리가 조금 더 단단해지고, 믿음이 굳어져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매번 우리에게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런 식으로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아니 나의 감정이 몹시 다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허탈한 기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소주 한 잔에 비참한 기분을 털고, 내일 또 가족을 위해 아무렇지 않은 가면을 쓰고 새벽 출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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