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2001)

by 카마

여자상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절친이었던 태희, 혜주, 지영, 비류, 온조는 졸업 후 각자의 생활에 젖어들며 서로 소원해지게 된다. 생뚱맞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닌 태희가 절친들의 관계를 이어보려 하지만, 현실주의자이자 독설가인 혜주와 디자이너를 꿈꾸지만 가난한 현실의 구렁에 깊이 빠져 있는 지영의 갈등을 풀기란 쉽지 않다. 무엇이 스무 살 그녀들을 갈등하게 했을까? 이 영화는 여고시절 서로에 대한 조건 없는 애정을 이어오던 관계의 변화와 학교를 벗어나 현실에 내던져진 소녀의 성장과 현실 적응에 관해 다루고 있다.

사춘기 소녀의 성장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의 존재가 사회에 내던져질 때 자아와 그를 둘러싼 사회와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아직 미성숙한 존재가 사회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적 현실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내면에 격렬한 화학작용을 일으켜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미래를 향한 긍정적 가치관 형성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 닿지 못하면 자아는 부정적 관념의 고착, 투사, 현실 비관, 회피에 빠지고 만다.

혜주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그대로 동화된 채 사회의 부정적 관념과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여상을 나온 고졸 경리라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현실에 지지 않으려고 힘겹게 싸워 나간다. 그녀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현실과 맞서고 있으며, 통속적이고 현실적인 가치의 추구를 통해 세속적 사회에서 버텨내고 성공에 이르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러한 혜주가 바라보기에 현실의 늪에 걸려 허우적대며 디자이너라는 닿지 않을 헛된 꿈만 바라보는 지영이 답답하기만 하다.

지영은 부모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사회적 방패막이 사라지고, 연로한 조부모와 함께 경제적 빈곤 상태에 놓이게 된다. 스스로 빈곤의 늪을 헤어 나오려 발버둥 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현실은 녹록지 않고, 현실을 비관하며 친구 관계마저 회피하게 된다. 그녀가 보기에 번듯해 보이는 직장에 들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며, 자신에게 현실을 일깨우는 독설만 하는 혜주가 눈에 거슬리기만 한다.

태희는 세상에 대한 편견 없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길거리의 외판원, 이주 노동자, 장애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함을 품고 있다. 중산층의 가정에서 큰 부족함 없이 자란 그녀는 자신의 안식처가 될 가정에서 오히려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지극히 현실적이며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그녀는 현실을 모르는 한낱 몽상가일 뿐이다. 결국 가정 내에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가족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오려버린 채 집을 나서고, 돌아갈 곳을 잃은 지영과 함께 워킹홀리데이를 위해 호주로 떠난다.

스무 살을 맞이한 그녀들이 마주한 현실은 그네들의 꿈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마주하고, 반응하고, 적응하고 혹은 회피했다. 모두가 현실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든 선택이 필요하고, 그 선택에는 반드시 주체의 결정이 뒤따르며, 주체의 결정 방식이 곧 인생관이고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셀 수도 없는 선택을 하며 삶을 살아오고, 과거라는 흔적을 남긴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아무도 모른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선택의 순간에 주변의 환경에 수동적으로 이끌리기보다는 자신이 온전히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혜주, 지영, 태희, 비류, 온조. 그녀들은 20여 년 지난 현재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녀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초록물고기(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