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TI
나르시시스트는 공감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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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를 두고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해왔다. 공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말이 절반만 맞는다고 생각한다.
정말 공감이 없다면, 어떻게 저 사람은 타인의 약점을 그렇게 빨리 알아차리는가. 정말 공감이 없다면, 어떻게 상대가 원하는 말과 인정의 포인트를 그렇게 정확히 짚는가. 정말 공감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을 끌어당기고, 흔들고, 조종할 수 있는가.
문제는 공감의 부재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공감의 방향이다.
기존 임상심리학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과대성, 과도한 찬사 욕구, 특권의식, 타인 이용, 공감 부족을 핵심 특징으로 설명한다. 미국정신의학회(APA)와 Mayo Clinic도 대체로 이 틀을 유지한다. 이 설명은 필요하다. 실제로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감정과 욕구를 존중하지 못하고, 관계를 자기 중심으로 재편한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현실의 나르시시스트는 너무 자주, 남의 마음을 잘 읽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런 사람으로 보인다. 나를 잘 이해해주는 사람. 내 결핍을 빨리 알아보는 사람. 내가 원하는 말을 해주는 사람.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 사람. 즉 현실에서는 공감 부족보다 공감 과잉처럼 보이는 순간조차 있다.
실제로 공감 연구에서도 병적 자기애에서 공감 전체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단순화하지 않는다. 타인을 읽는 능력과 그것을 친사회적으로 쓰는 능력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핵심은 공감 엔진의 부재가 아니라, 공감 엔진의 사용 방식에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공감이론이 기존 심리학의 언어를 완전히 뒤집는다.
공감이론에서 존재는 공감을 통해 커진다. 정상적인 관계에서는 내가 너와 공감하고, 너도 나와 공감할 때, 서로의 존재감이 함께 커진다. 이것이 관계의 기본 원리다. 둘이 만나면 둘 다 더 커진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이 법칙을 다르게 배웠다. 함께 공감하면 함께 커진다가 아니라, 타인의 공감을 내가 독점해야 내가 커진다. 상대의 존재를 낮춰야 내가 높아진다. 상대의 시선과 인정과 감정을 빼앗아야 내가 특별해진다.
문제는 공감 부족이 아니다. 공감 독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공감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다. 공감을 함께 나누는 힘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독점적으로 부풀리는 자원으로 쓰는 사람이다. 이 차이가 전부다.
왜 이렇게 됐는가. 나는 이 사람이 존재를 키우는 방식을 잘못 배운 사람이라고 본다.
이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공감하며 존재감이 커지는 경험보다, 타인의 관심을 빼앗고, 인정과 시선을 독점하고, 비교 우위를 점할 때 존재감이 커지는 경험을 더 많이 했을 수 있다. 혹은 반대로 함께 공감하며 존재를 키우려 했지만 반복적으로 실패했을 수 있다.
그 결과 이런 학습이 생긴다. 함께 공감해선 내가 안 커진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독점해야 한다. 상대보다 내가 특별해야 한다. 상대가 줄어들어야 내가 커진다.
병적 자기애의 밑바닥에는 불안정한 자기존중감과 취약한 자기구조가 놓여 있다는 해석이 전문 영역에서도 널리 제시된다. 겉으로는 거대하고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그 밑에는 타인의 시선과 인정 없이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가 있다.
나르시즘은 단순한 우월감이 아니다. 존재를 키우는 방식을 잘못 학습한 결과다.
EETI로 보면 어디가 비틀어졌는지가 보인다.
나르시시스트의 문제는 공감의 양이 아니라 공감의 방식이다. 1축부터 보자. 의지는 강하다. 자기 존재를 키우고 싶어 한다. 반응도 약하지 않다. 오히려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매우 민감하다. 인정이 없으면 흔들린다. 무시당하면 폭발한다. 이것은 반응이 강한 구조다.
2축을 보자. 공감OS가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다. 타인의 감정과 취약점, 인정 욕구를 잘 읽는다. 문제는 그것이 상호 공감이 아니라 자기 중심 전략으로 쓰인다는 점이다. 읽는다. 그런데 함께하지 않는다. 읽은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3축이 핵심이다. 출력과 대응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왜곡되어 있다. 출력은 존재를 함께 키우는 출력이 아니라 상대를 덮는 출력이다. 대응은 상호 조율이 아니라 상대를 유도하고 관리하는 대응이다. 겉으로는 출력과 대응이 강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건강한 3축이 아니다.
4축도 마찬가지다. 학습과 진화가 약한 것이 아니다. 잘못 굳어졌다. 사람을 읽고, 반복하고, 패턴을 만들고, 자기 존재를 지키는 데는 매우 집요하다. 문제는 그 학습과 진화가 상호 공감이 아니라 독점 공감 쪽으로 굳었다는 점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문제는 공감 능력의 약함이 아니다. 출력과 대응의 왜곡, 학습과 진화의 비뚤어진 방향성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공감방식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상대를 빨리 읽는다. 하지만 읽은 것을 함께하기보다 장악에 쓴다. 초기에는 강한 관심과 인정으로 공감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공감은 상대를 자기 질서 안에 넣기 위한 장치가 된다. 처음에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나중에는 그 느낌을 빌미로 나를 통제한다.
상대의 존재를 키우는 공감보다 상대를 흔들어 자기 존재를 더 크게 느끼는 방식으로 간다. 상대가 상처받았을 때 진짜로 멈추기보다 그 상처를 해석하고 이용하고 다시 자기 중심으로 끌어온다.
나르시시스트의 공감방식은 상호 공감이 아니라 흡수형 공감에 가깝다. 빨아들인다. 내 쪽으로 끌어당긴다. 함께 커지지 않는다. 혼자 커진다.
기존 심리학의 해법이 자주 실패하는 이유가 있다.
기존 접근은 자주 이런 식이다. 공감을 배워라.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라. 감정을 존중해라. 자기중심성을 줄여라.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방식이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문제의 핵심이 공감의 유무가 아니라 공감을 통해 존재를 키우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는 이미 공감 엔진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엔진이 자기 존재를 독점적으로 부풀리는 쪽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 공감해라라는 말은 충분하지 않다. 이미 읽고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 능력 추가가 아니다. 공감 사용 방식의 재배치다.
그렇다면 진짜 해법은 무엇인가.
도덕 훈계가 아니다. 남도 좀 생각해라라는 말은 이미 충분히 했다. 그리고 그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유도 이제 알게 됐다. 그 말이 가리키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방향이 비틀어져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다른 경험이다. 타인의 공감을 빼앗거나 왜곡하지 않아도 내 존재는 유지될 수 있다는 경험. 상대를 낮추지 않아도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경험. 건강한 출력으로도 내 존재감이 올라갈 수 있다는 학습. 상호적인 대응을 통해서도 내 존재가 커질 수 있다는 학습. 그리고 함께 공감할수록 함께 존재가 커진다는 경험의 반복.
실제 치료도 단순 교정보다는 장기적 심리치료 속에서 자기기능, 수치심, 대인관계 패턴, 자기와 타인에 대한 경험을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치료는 어렵고, 치료 동기와 지속적 관계 형성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바꾸어야 하는 것이 습관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회복은 남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우는 일이 아니다. 함께 공감하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존재감을 준다는 것을 다시 배우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야 한다.
해법을 말했다. 함께 공감하는 것이 더 깊은 존재감을 준다고 했다. 분배가 독점보다 더 오래가는 전략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솔직해져야 한다. 이 해법이 그들에게 통할 것인가.
나는 회의적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입장에서 계산해보자.
공감을 독점한다. 시선을 장악한다. 상대를 낮추고 자신을 높인다. 이 방식이 그들에게 실제로 통해왔다. 조직에서 올라갔다. 권력을 얻었다. 자본이 쌓였다. 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 경험이 수십 년 반복되었다.
그 사람에게 지금 이렇게 말한다고 해보자. 공감을 나눠가져라. 함께 존재가 커진다. 분배가 더 좋은 전략이다. 그 말이 들릴까.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경험이 정반대를 증명해왔기 때문이다.
사회가 이 구조를 부추긴다는 것도 봐야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가 옳다. 자본이 성공을 증명한다. 독점이 강함의 증거다. 특정 기득권을 유지하고 시스템을 장악하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는 성공이다. 사회는 오랫동안 이 방식에 보상을 해왔다. 그러니 그들이 왜 바뀌어야 하는가.
분배와 공동의 책임을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지켜온 생존 전략이다. 그 전략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눔의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지금까지 성공해온 방식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해법은 맞지만, 그 해법이 그들에게 직접 통하리라는 기대는 순진하다.
그렇다면 왜 이 글을 쓰는가.
나르시시스트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실체가 보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특별해 보이던 사람이 읽히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이던 방식의 목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공감 독점의 전략은 효율을 잃는다.
공감을 독점하려면 상대가 모르고 있어야 한다. 읽혀버리면 독점이 어렵다. 타인의 인정을 빼앗으려면 상대가 자신의 공감을 어디에 주는지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더 이상 쉽게 빼앗기지 않는다.
그들은 더 치밀한 새로운 전략을 펼지도 모른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전략의 정교화에는 에너지가 든다. 그리고 그 정교화가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온다. 독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환경이 넓어지면, 그들도 결국 다른 방식을 탐색하게 된다.
인류는 결국 이 방향으로 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독점보다 상생이 더 오래가는 전략이라는 것을 역사가 반복해서 보여줬다. 독점으로 올라간 개인은 강하지만 취약하다. 혼자 지탱해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공감하며 만들어진 구조는 느리지만 단단하다. 여럿이 지탱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에 기반한 상생이 가장 좋은 전략이라는 것을 인류는 반복해서 학습해왔다. 독점이 단기적으로 강해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다양성이 더 강하다는 것을. 그것이 생태계의 원리이고, 공동체의 원리이고, 결국 공감의 원리다.
나르시시스트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그 사람의 공감 독점 전략을 이미 보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그 사람이 당신을 특별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가.
실체를 아는 것이 첫 번째 해법이다. 그리고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공감 독점이 통하는 세상은 조금씩 좁아진다.
함께 공감할 때 함께 존재가 커진다. 나르시즘은 바로 이 가장 단순한 법칙을 잃어버린 상태다. 그리고 그 법칙을 잃어버린 개인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 혼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