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세분화의 시대, 우리는 어디까지 흩어질 수 있을까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

by kamaitsra

더 이상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기 어려워질 때, 사람은 더 작고 정확한 공감장으로 이동한다




같은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데도, 우리는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누군가는 새벽에 클라이밍을 하고, 누군가는 비건 식단을 고집하고, 누군가는 특정 로스터리 커피만 마시고, 누군가는 자기만의 팬덤 세계 안에서 산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좋아하는 음악, 먹는 음식, 운동 방식, 여행지, 소비 습관, 관계 방식이 너무 달라졌다. 예전에는 어느 학교, 어느 직장, 어느 지역이 사람을 설명했다. 지금은 어떤 취향, 어떤 감각, 어떤 라이프스타일이 더 강하게 사람을 설명한다.


왜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는 이렇게 정체성과 취향이 세분화되었을까. 사람들이 단순히 까다로워지고 예민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다. 핵심은 다른 데 있다. 더 이상 큰 공동체 안에서 공감받으며 존재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작은 취향과 더 미세한 정체성 안에서라도 공감받고 존재하려고 이동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원래 공동체 정체성이 강한 사회였다.


가족, 학교, 직장, 국가, 세대, 지역. 이 큰 집단 공감장이 오래, 강하게 작동해왔다. 위기 때 빠르게 결집했다. 집단적 목표를 향해 함께 움직였다. 개인은 공동체 안에서 비교적 쉽게 존재를 승인받았다. 어느 집 자식인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으면 존재가 설명되었다. 나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구조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공동체 정체성이 너무 크면 한계가 생긴다. 개별 취향은 존중받기 어렵다. 다양한 정체성이 살아남기 어렵다. 너무 강한 공동체는 하나의 방향으로 모든 것을 빨아당기는 블랙홀처럼 작동한다. 공감 블랙홀. 너무 크면 다 삼켜버린다. 과거의 한국 사회는 공동체의 공감장이 큰 사회였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크면 다양성은 억압되기 쉽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공동체가 지난 10년 동안 약해졌다.


가족의 힘이 느슨해졌다. 결혼이 늦어지고, 1인 가구가 36%를 넘으며, 혼자 사는 것이 표준이 됐다. 학벌의 승인력이 약해졌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예전처럼 삶이 설명되거나 미래가 자동 승인되지 않는다. 직장의 승인력도 약해졌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이제 됐다는 감각이 예전처럼 강하지 않다. 불안은 계속된다. 국가와 세대 단위의 공감도 약해졌다. 같은 세대라고 해서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같은 나라 안에 있어도 서로 다른 감각과 이해관계가 더 커졌다.


그 결과 이상한 일이 생겼다. 공동체에 속해 있어도 충분히 공감받고 존재한다고 느끼기 어려워졌다. 회사를 다니는데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가족이 있는데도 내 감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학교를 다녔는데도 나를 진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공동체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개인의 존재를 충분히 승인해주지 못한다. 같이 속해 있다고 해서 더 이상 존재가 보장되지 않는 시대가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동했다.


큰 공동체가 나를 공감해주지 못하면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더 작고 더 정밀한 공감장으로 이동한다. 나와 같은 음악 취향. 나와 같은 음식 취향. 나와 같은 운동 방식. 나와 같은 세계관. 나와 같은 감정 코드.


이 이동을 단순한 개성 표현으로 보면 놓친다. 세분화는 사치가 아니다. 존재를 지키기 위한 이동이다. 큰 공동체에서 공감받지 못한 사람이 나를 정확히 알아주는 작은 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모두에게 공감받기 어려워질수록 사람은 자신을 더 정확히 알아주는 작은 공감장으로 이동한다. 정체성과 취향의 세분화는 개성의 유행이 아니라,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이동이었다.




지난 10년의 한국은 생활 전반에서 실제로 잘게 갈라졌다.


생활 단위가 쪼개졌다. 혼밥, 혼술, 혼행, 1인 가구. 이건 단순 생활 방식의 변화가 아니다. 공동체가 주던 공감을 이제 혼자서 운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독서와 지식 취향이 갈라졌다. 모두가 같은 베스트셀러를 읽기보다, 각자의 관심사와 세계관에 맞는 책을 찾는다. 책도 공동체의 교양보다 개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도구가 됐다.


음악과 팬덤이 갈라졌다. 예전에는 국민 드라마, 대중가요처럼 모두가 아는 큰 공감장이 있었다. 지금은 같은 K-팝 안에서도 미세한 취향 구분이 생겼다. 모두가 아는 하나가 아니라, 내가 아는 나만의 것이 중요해졌다.


공간 취향도 정체성이 됐다. 어떤 카페를 가는가, 어느 동네를 산책하는가, 어떤 팝업을 가는가. 어디를 가는가가 나는 누구인가를 설명하게 됐다.


식생활과 몸도 정체성이 됐다. 비건, 저속노화, 고단백, 클라이밍, 러닝, 필라테스. 단순 취미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정체성 표현이다.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에서 세분화는 일부 영역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하나의 대형 공감장에 머물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작은 공감장을 여러 개로 나누어 가지기 시작했다.




8대2 법칙으로 보면 이 변화는 누가 만들었는지가 보인다.


모든 변화는 극단이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간이 만든다. 사회를 세 집단으로 나눠보면 명확하다. 첫 번째 20%는 공동체의 공감을 강하게 따르는 집단이다. 전통적 규범, 집단적 정체성, 공동체 질서에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 마지막 20%는 취향이 강한 집단이다. 개별 정체성과 독특한 취향을 강하게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60%는 회색분자다. 언제든 어느 쪽으로도 이동할 수 있는 다수, 사회를 실제로 움직이는 핵심 집단이다.


과거의 한국 사회는 공동체 공감을 따르려는 쪽이 사실상 80%에 가까웠다. 가운데 60%가 대부분 공동체 쪽에 머물렀다. 취향 중심 부류는 말 그대로 주변적이었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큰 공동체의 승인력이 약해지자, 가운데 60%의 회색분자들이 대거 개별 취향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세분화된 취향과 개인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사회 전체가 이동했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극단의 20%가 아니라, 이동 가능한 60%의 회색분자다. 그들이 움직였을 때 사회의 기울기가 바뀐다.




그런데 세분화는 마냥 좋은 것이 아니다.


처음엔 다양성처럼 보인다. 실제로 다양성을 넓히는 좋은 기능도 있다. 예전에는 공동체가 인정하지 않았던 정체성들이 살아남고, 예전에는 이상하다고 여겨졌던 취향들이 공감을 얻게 됐다. 이건 분명히 좋은 변화다.


그런데 세분화가 지나쳐지면 위험한 지점이 생긴다. 나와 비슷한 것만 보고 싶어진다. 자극이 강한 취향만 찾게 된다. 더 세고 더 독특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공통 감각은 줄어들고 자기 취향에 갇힌다. 공동체는 해체되지만 새로운 집단주의가 생기기도 한다. 내 취향이 곧 정답이고, 다른 취향은 틀렸다는 감각이 강해진다. 미국의 젠더 정체성 세분화 논쟁이 그 한계를 잘 보여준다.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적 이해와 공감을 확장하는 기능이 있지만, 너무 많은 세분화는 오히려 공감받기 어려운 상태를 만든다. 세분화는 다양성의 진화일 수 있지만, 지나치면 극단적 취향과 쾌락주의로 흐를 수 있다. 그럴 경우 세분화는 공감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감 자체를 약화시킨다.




너무 잘게 쪼개지면 결국 반응을 잃고 존재하기 어려워진다.


어느 정도의 세분화는 사회적 이해와 공감을 넓힌다. 하지만 너무 많은 세분화는 오히려 반응을 잃는다. 나는 나를 아주 정교하게 설명하고 싶은데, 사회가 그것을 다 이해하고 반응해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지는 있지만 반응이 없는 상태. 공감이론에서 존재는 의지가 반응을 만나 공감으로 이어질 때 실체화된다. 반응이 없으면 공감이 생기기 어렵다. 공감이 없으면 존재도 약해진다. 너무 작게 쪼개진 정체성은 결국 반응을 잃는다. 공감은 너무 크면 블랙홀이 되고, 너무 작으면 사라진다. 세분화의 적정 크기가 있다. 그 크기를 넘으면 취향이 공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 고립을 만든다.




결국 미래는 다시 공감 가능한 수준에서 재구성될 것이다.


세분화는 무한히 지속되지 않는다. 어느 수준에서 다시 정리된다. 젠더 세분화도, 취향 세분화도, 라이프스타일 세분화도 끝없이 잘게만 나아가진 않는다. 결국 사회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가고, 그 지점에서 다시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 세분화에 맞는 공동체와 문화가 형성된다.


일부 취향과 정체성은 살아남고, 일부는 공감받지 못해 도태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공감 진화의 결과다. 새로운 공동체는 예전처럼 학교나 직장 같은 구조가 아니라, 취향과 가치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클라이밍 커뮤니티, 러닝 크루, 독서 모임, 비건 네트워크, 특정 팬덤. 이것들이 예전의 마을이나 조직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수준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다시 형성된다. 도태되는 취향과 살아남는 취향이 갈리는 것 역시 공감 진화의 결과다.




지난 10년의 한국은 급격한 분화의 시대였다.


한국 사회는 원래 80%가 공동체 공감을 추구하던 사회였다. 그런데 큰 공동체가 더 이상 충분히 개인을 승인해주지 못하자, 가운데 60%의 회색분자들이 대거 취향 중심 흐름으로 이동하며 세분화가 폭발했다. 그 세분화는 사람들이 예민해져서가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더 작고 정확한 공감장을 찾아간 결과였다.


그리고 세분화는 무한히 지속되지 않는다. 너무 잘게 쪼개진 취향은 오래 존재하기 어렵다. 결국 한국 사회는 공감 가능한 수준에서 다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며 다음 단계로 진화할 것이다.


당신의 취향과 정체성은 지금 공감받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 작아져서 반응을 잃어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