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의 한국 사회
쉬운 공감의 시대, 왜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빨리 분류하게 되었는가
언제부터인가 대화가 너무 빨라졌다.
정치 얘기만 나오면 곧바로 편이 갈린다. 남녀 문제만 나와도 상대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 처음 듣는 단어도 금방 뜻을 알아듣는다. 설명이 필요 없다. 방향만 파악하면 된다. 누군가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나중에는 아예 포기한다. 그 사람이 이상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한국 사회는 이렇게 빨리 사람을 분류하고, 쉽게 낙인찍고, 곧장 양극으로 갈라지게 되었는가. 정말 사람들이 더 악해져서인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더 쉽고 빠른 공감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복잡한 맥락을 천천히 이해하는 대신, 빠르고 명확한 방향으로 즉각 공감하는 방식이 일상화되었다. 그 결과가 이분법이고, 양극화이고, 낙인어다.
쉬운 공감이란 무엇인가.
쉬운 공감은 단순히 공감이 많아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표면만 보고 이해한다. 맥락보다 방향을 먼저 본다. 사람보다 표지를 먼저 본다. 복잡한 설명보다 즉각적 판단을 선호한다. 쉬운 공감은 상대를 깊게 이해하는 공감이 아니라, 빨리 분류하고 방향을 정하는 공감이다.
왜 쉬운가. 시간이 적게 든다. 에너지가 덜 든다. 디지털 환경에 잘 맞는다. 갈등 상황에서 즉각 반응하기 쉽다. 쉽기 때문에 강력하지만, 쉽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 쉬운 공감이 지난 10년 동안 사회 전체를 조금씩 바꿔왔다.
왜 한국 사회는 이렇게 쉬운 공감에 익숙해졌는가.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첫째, 공동체가 약해졌다. 예전에는 가족, 학교, 직장, 지역이라는 큰 공동체가 사람을 어느 정도 설명해줬다. 그 안에서 천천히 서로를 알아갔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그 공감장이 약해졌다. 2024년 기준 1인 가구는 36%를 넘었다. 결혼은 늦어졌고, 직장은 불안정해졌다. 큰 공동체 안에서 천천히 이해되기보다, 작은 표지와 즉각적 분류에 더 기대게 됐다.
둘째, 디지털 환경이 느린 이해를 밀어냈다. 디지털 환경은 길고 복잡한 이해보다 짧고 빠른 반응을 선호한다. 긴 설명보다 짧은 단어, 맥락보다 밈, 이해보다 확신, 토론보다 반응. OECD도 디지털 정보 환경이 사람들의 판단을 더 즉각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알고리즘은 복잡한 인간을 이해하도록 돕지 않는다. 더 강한 자극을 더 빠르게 공급할 뿐이다.
셋째, 구조적 불안이 커졌다. 취업, 주거, 젠더 역할, 정치 불신, 안전 문제. 불안이 클수록 사람은 복잡한 설명보다 쉬운 원인을 찾으려 한다. 저쪽이 문제다. 저 집단이 원인이다. 저 성별은 원래 그렇다. 쉬운 원인이 있으면 분노도 빨리 방향을 찾는다. 불안이 클수록 쉬운 공감은 더 강해진다. 공동체는 약해지고, 디지털은 빨라지고, 불안은 커졌다. 이 세 조건은 쉬운 공감이 유행하기에 가장 좋은 토양이었다.
쉬운 공감은 왜 이분법을 낳는가.
쉬운 공감은 본질적으로 중간을 싫어한다. 중간은 복잡하고, 느리고,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쉬운 공감은 자연스럽게 이분법으로 간다. 이것 아니면 저것. 우리 아니면 저들. 피해자 아니면 가해자. 진보 아니면 수구. 이렇게 되면 중간이 사라진다.
공감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한 공감은 다양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힘이다. 그런데 쉬운 공감은 다양성을 버리고 단순한 이분법으로 간다. 쉬운 공감은 공감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축소하고 단순화하는 방식이다. 중간이 생기면 이해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쉬운 공감은 중간을 지운다. 양극화는 차이가 커진 결과만이 아니라, 중간을 이해할 의지가 줄어든 결과다.
정치 젠더 양극화는 쉬운 공감의 대표적 결과다.
정치 양극화는 더 이상 단순한 정책 갈등이 아니다. 상대를 하나의 정치 표지로 읽는다. 저 사람은 보수니까. 저 사람은 진보니까. 저쪽은 원래 저렇다. 젠더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은 남자라서. 저 사람은 여자라서. 그 성별은 원래 그렇다. 2024년 통계청 사회조사에서 사회갈등으로 보수와 진보 갈등이 77.5%, 빈곤층과 중상층 갈등이 74.8%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이 수치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미 이분법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양극화의 본질은 견해 충돌보다 사람을 표지로 축소하는 데 있다. 상대는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 이미지가 된다. 개인이 사라지고 유형만 남는다. 그 유형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형이 원래 그렇다는 결론이 먼저 나온다.
낙인어는 쉬운 공감의 언어적 결과물이다.
좌빨, 수구꼴통, 틀딱, 개딸, 태극기 부대
한남, 김치녀, 맘충
흙수저, 금수조, 급식, 잼민이
지방러, 서울촌놈, 허세충
낙인어는 왜 강한가. 짧다. 빠르다. 설명이 필요 없다. 상대를 즉시 정리할 수 있다. 낙인어는 복잡한 사람을 한 단어로 줄이는 기술이다. 정치, 젠더, 세대, 계층, 소비 취향 전반에서 계속 새로운 낙인어가 생겨난다. 어떤 사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포기한다. 처음 듣는 낙인어도 바로 이해되는 이유는, 사회 전체가 이미 쉬운 공감 구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틀이 먼저 있다. 단어가 그 틀을 채울 뿐이다.
낙인어는 공감을 생략하고 판단을 끝내는 언어다. 설명보다 분류가 쉬워질수록 낙인어는 강해진다. 새로운 낙인어가 빠르게 퍼진다는 것은, 사회가 사람을 더 빨리 정리하려 한다는 뜻이다.
MBTI도 이 흐름의 일부다.
MBTI는 원래 자기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일 수 있다. 하지만 유행이 되면 기능이 달라진다. 저 사람은 E라서. 저 사람은 T라서. 저 유형은 원래 그렇다. 복잡한 개인을 빠르게 정리하는 장치가 된다. 생각해보면 E이면서 I인 사람도 있다. T지만 슬픈 영화를 보면 그렇게 슬프다. P라도 중요한 순간이면 계획적이다. 중간있다. 조율이 있다. 다양성이 있다.
이건 낙인어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쉬운 공감을 위한 사회적 분류 장치라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MBTI는 이해의 도구일 수 있지만, 유행이 되면 쉬운 공감의 분류 장치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분류하는 사회로 이동해왔다.
양극화의 진짜 문제는 중간이 사라지는 데 있다.
현실에는 중간이 훨씬 많다. 좌우를 둘 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각각의 좋은 정책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 가부장적이지 않은 남성이 있고, 체력이 강한 여성이 있다. 명품을 좋아하지만 허영만은 아닌 사람이 있고, 검소하지만 특정 낙인으로 억울하게 분류되는 사람이 있다.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그런데 쉬운 공감은 이런 중간을 지운다.
왜냐하면 중간은 생각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맥락이 필요하고, 분류가 어렵기 때문이다. 양극화 사회의 가장 큰 손실은 중간의 가치가 사라지는 데 있다. 현실에는 중간이 훨씬 많지만, 쉬운 공감은 그 중간을 지운다.
그리고 이 사회는 점점 더 피곤해진다.
쉬운 공감은 처음엔 편하다. 그런데 장기적으로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계속 편을 정해야 한다. 계속 새로운 낙인어를 배워야 한다. 계속 누가 누구 편인지 파악해야 한다. 계속 틀리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이 생긴다. 어제의 말이 오늘의 낙인이 된다. 맥락 없이 잘린 문장이 방향을 결정한다. 쉬운 공감은 쉬워 보이지만, 결국 사회 전체를 더 피곤하게 만든다. 분류는 빠르지만, 그 빠른 분류에 계속 맞춰 살아야 하는 사회는 지친다.
그러나 쉬운 공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존재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공감이론에서 존재는 의지가 반응을 만나 공감으로 이어질 때 실체화된다. 쉬운 공감은 개인의 의지를 표지로 치환한다.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유형이 반응을 받는다. 진짜 나는 공감받지 못하고, 내가 속한 범주만 반응을 받는다. 결국 그 사람의 존재감은 약해진다.
다양성도 훼손된다. 이분법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든 극단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중간에 있는 사람은 존재감을 잃는다. 결국 실제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이 지워지고, 사회는 더 단조로워진다. 사회는 결국 그 폐해를 통해 학습한다. 쉬운 공감이 만들어낸 피로와 단조로움 끝에, 다시 중도, 중간, 다양성, 복합성을 회복하려는 힘이 생길 수 있다.
중도는 말로 외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성공한 행정과 정치가 보여줘야 한다. 정치가 중간의 가치를 실질적으로 증명해낼 때, 사회도 쉬운 공감보다 다양성을 다시 배우기 시작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이 안보, 경제, 사회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에서, 중도의 성공은 단순한 정치 과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감 회복을 위한 시험대가 된다.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는 쉬운 공감이 유행한 사회였다.
그 결과 이분법이 강해지고, 양극화와 낙인어가 일상화되었고, 중간과 다양성은 지워졌다. 그러나 쉬운 공감은 존재를 약화시키고 사회를 지치게 만들기 때문에 오래가기 어렵다. 결국 우리는 다시 중도와 중간, 다양성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회복하고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은 지금 상대를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빠르게 분류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