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너머, 한국 사회가 관심을 가져할 공감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

by kamaitsra

처음에는 키워드였다.


혼자 사는 삶의 표준화. 연애와 결혼과 출산의 지연. 청년의 취업 불안과 부모 의존. 계층 이동 불신과 자산 격차. 부동산과 코인 중심의 벼락서사. 갓생과 무지출. 정체성과 취향의 세분화. 정치 젠더 양극화와 낙인어의 일상화.


처음에는 각각 따로 떨어진 현상처럼 보였다. 하나의 트렌드 분석처럼 보였다. 그런데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전혀 다른 키워드들이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공감받고 존재하려 했는가.


이것이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우리가 도달한 자리였다.




키워드는 유용했다.


복잡한 시대를 빠르게 정리해줬다. 사람들의 감정을 압축해서 보여줬다. 한국 사회의 집단 심리를 짧은 언어로 보여줬다. 우리는 키워드를 통해 서로를 빠르게 이해하고, 빠르게 공감했다.


키워드는 시대의 감정을 짧고 강하게 압축해주는 언어였다. 우리는 키워드를 통해 복잡한 현실을 빨리 이해하고, 빨리 서로를 읽고, 빨리 반응했다.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는 어쩌면 키워드로 공감하며 살아온 사회였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이 시대를 버티기 위한 효율적인 언어였다.




그런데 키워드는 사람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혼자 산다고 해서 모두 고립된 것은 아니었다. 갓생을 산다고 해서 모두 건강한 것은 아니었다. 무지출을 한다고 해서 모두 가난한 것도 아니었다. 자산을 중시한다고 해서 모두 탐욕적인 것도 아니었다. 취향이 세분화되었다고 해서 모두 이기적인 것도 아니었다. 양극화 사회를 산다고 해서 모두 극단적인 것도 아니었다.


키워드는 시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한 사람을 끝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키워드로 쉽게 연결되었지만, 동시에 그 키워드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자기 자신 때문에 흔들리기도 했다. 빠른 공감은 있었지만, 충분한 이해는 아니었다.


이 괴리감은 지난 10년 동안 조용히 쌓였다. 키워드가 나를 설명해주는 편리함과, 그 키워드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했다.




우리가 분석한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모였다.


예전에는 가족, 학교, 직장, 공동체, 국가 같은 큰 공감장이 사람을 어느 정도 승인해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천천히 서로를 알아갔다. 내가 누구인지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소속이 존재를 설명해줬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그 힘이 약해졌다. 가족의 결속이 느슨해졌다. 학벌의 승인력이 떨어졌다. 직장의 안정성이 흔들렸다. 국가와 세대 단위의 공감도 갈라졌다. 그 결과 사람들은 각자 존재를 떠안게 됐다.


혼자 살아야 했고, 혼자 미래를 책임져야 했고, 혼자 시간을 관리해야 했고, 혼자 소비를 통제해야 했고, 혼자 자산을 쌓아야 했고, 혼자 정체성을 설명해야 했고, 혼자 편을 정하고 혼자 버텨야 했다.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는 공동체가 약해진 자리에서 개인이 자기 존재를 직접 떠안은 사회였다. 우리가 본 수많은 키워드는 결국 각자가 어떻게든 공감받고 존재하려 한 흔적이었다. 트렌드는 달랐지만, 그 밑에는 혼자 존재해야 한다는 압박이 공통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작고 빠르고 쉬운 공감으로 이동했다.


공동체가 약해지고, 미래는 불안하고, 설명해야 할 것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더 깊고 넓은 공감보다 더 작고 빠르고 쉬운 공감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키워드로 사람을 설명하고, 루틴으로 존재를 붙들고, 무지출로 불안을 통제하고, 자산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취향으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고, 낙인어로 상대를 빠르게 분류하고, 벼락서사로 즉시 존재 점프를 꿈꿨다.


우리는 더 깊은 공감보다 더 빠른 공감을 택했다.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는 쉽게 공감하고, 빨리 존재하려 한 사회였다. 그것은 편리했지만, 동시에 얕고 불안정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얕음을 사람들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루틴을 지켜도 이상하게 허전했다. 자산이 쌓여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취향이 정밀해질수록 오히려 더 외로워지는 감각이 있었다. 낙인어로 빠르게 분류했지만, 분류할수록 더 피곤했다.




지난 10년은 개인의 시대가 아니라 불안한 개인의 시대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기를 개인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난 10년은 자유로운 개인의 시대라기보다, 불안한 개인의 시대였다.


혼자 살지만 외로웠다. 취향은 많지만 깊은 연결은 적었다. 루틴은 있지만 그것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절제는 있지만 여유로워서가 아니었다. 자산을 원하지만 그만큼 존재는 더 불안했다. 정체성을 세분화했지만, 더 이상 큰 공동체가 나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개인화는 해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동체 약화 이후 개인이 혼자 감당하게 된 무게이기도 했다. 지난 10년은 개인의 시대였지만, 더 정확히는 불안한 개인의 시대였다. 각자는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각자 버텨야 했다. 우리가 분석한 키워드들은 모두 그 버팀의 방식이었다.




우리가 결국 도달한 하나의 결론이 있다.


우리가 그동안 분석한 모든 현상은 결국 이 질문으로 모인다. 사람은 어떻게 공감받아 존재하는가.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공동체가 약해졌으니 각자가 알아서 존재해야 한다. 더 작고 더 빠르고 더 쉬운 공감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키워드, 취향, 자산, 루틴, 낙인어, 벼락서사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실체화해야 한다.


하지만 이 답은 완전하지 않았다. 너무 빠르고, 너무 얕고, 너무 불안정했다.


우리가 분석한 모든 현상은 결국 어떻게 공감받아 존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지난 10년은 그 답을 각자가 혼자 찾으려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혼자 찾은 답은 오래가기에 너무 얕고 불안했다.




그렇다면 다음은 어디로 가는가.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충분히 빨리 공감해봤다. 충분히 쉽게 공감해봤다. 충분히 작게 쪼개진 공감장 안에서 살아봤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있다. 쉬운 공감은 편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빠른 공감은 즉각적이지만 깊지 못한다. 작은 공감장은 섬세하지만 불안정하다. 키워드는 유용하지만 사람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혼자 존재하는 방식은 가능하지만 무겁다.


그래서 다음 단계는 다시 더 깊고 넓은 공감을 향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과거의 거대한 집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상호 공감이고, 중간을 이해하는 힘이고, 다양성을 견디는 능력이고, 서로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해도 함께 존재하는 기술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너무 빨리 공감했고, 너무 쉽게 서로를 이해하려 했다. 이제 다음 시대는 다시 복잡함을 견디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며 함께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난 10년의 한국 사회는 키워드로 쉽게 공감하며 빠르게 존재하려 했던 사회였다.


그 키워드들은 분명 유용했다. 버티기 위한 언어였고,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오래가는 존재는 결국 더 깊고 넓은 공감 속에서만 가능하다. 한 사람을 키워드 하나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시대를 트렌드 하나로 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 사실을 지난 10년이 몸으로 가르쳐줬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다음 진화는, 다시 함께 존재하는 방식을 배우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당신은 지난 10년 동안 어떤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해왔는가. 그리고 그 방식은 지금의 당신을 충분히 살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