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

존재

by kamaitsra

출근길 지하철 2호선. 수요일 아침 8시 22분. 사람들이 문 앞에 겹쳐 선다. 어깨가 닿고, 가방이 부딪히고, 숨소리가 섞인다. 하지만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는다. 시선은 핸드폰 화면에, 창밖 어둠에, 광고판 글씨에 고정되어 있다. 이 많은 존재들이 한 공간에 있지만, 아무도 서로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건 존재인가?


나는 가끔 이 풍경 앞에서 숨이 막힌다. 살아 있는 몸들이 이렇게 빽빽이 모여 있는데, 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가. 반응이 없다. 공명이 없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지운 채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 인간이 살아 있지만, '공감 없는 생존'은 '존재 부재'로 느껴지는 순간.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뒤집어본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존재는 공감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공감 없는 존재는 기록되지 않는다. 반응하지 않는 존재는 사라진다. 존재란 '있음'이 아니라 '공감받음'이다. 이 문장을 처음 썼을 때, 나는 내가 너무 멀리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장이 옳다는 확신이 커진다. 우리는 공감할 때만 존재한다. 공감이 약해지면, 존재도 희미해진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의식 중심의 존재 정의. 생각하는 주체가 있으면 존재가 보장된다는 논리. 나는 이 문장을 오랫동안 믿었다. 하지만 이제 의심한다. 생각만으로 존재가 증명되는가?


하이데거는 "존재는 현존(現存, Dasein) 속에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세계-내-존재. 존재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나는 이 말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하지만 하이데거도 여전히 인간 중심이다. 존재를 묻는 주체가 인간이다.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다. 자유와 선택 중심의 존재론. 우리는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의미를 만든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의 자각에 머물러 있다.


불교는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한다"고 말한다. 상호 의존적 존재론.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나는 이 관점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존재의 실체는 여기서 불교의 연기와 가장 가까우나, 감정과 에너지의 교환까지 확장한다.


철학은 존재를 '내면의 자각'으로 정의했지만, 나는 존재를 '외부와의 공감'으로 본다. 생각이 아닌, 공감 여부가 존재를 증명한다.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보다, 누군와 공감한다는 사실이 내 존재를 더 분명하게 만든다.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생각하기 전에 먼저 존재한다. 공감이 존재를 앞선다.




빛의 존재를 생각한다. 빛은 반사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진공 속을 지나가는 빛은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다. 무언가에 부딪혀야, 반응해야, 비로소 '빛'으로 감지된다. 즉, 공감(반응)이 없으면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만 감지되지 않는다. 감지되지 않는 존재는 존재와 무엇이 다른가?


소리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진동은 매질이 없으면 전달되지 않는다. 우주 공간에서는 소리가 없다. 공기가 없기 때문이다. 공감할 대상이 없으면 소리는 무의미하다. 소리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귀가 필요하다. 고막이 필요하다. 반응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생명의 존재. 세포는 상호 신호 교환을 통해 유지된다. 세포막을 통해 이온이 오가고, 호르몬이 전달되고, 신경 전달물질이 시냅스를 건넌다. 이 교환이 멈추면 세포는 죽는다. 단절되면 죽음이 찾아온다. 생명은 교환이다. 생명은 반응이다. 생명은 공감이다.


사회적 존재. 관계가 끊긴 인간은 '사회적 죽음'을 경험한다. 고독사의 비극은 단지 혼자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랜 시간 아무도 그의 존재에 반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몇 주, 몇 달이 지나도 발견되지 않는 시신. 그는 살아 있었지만 공감하지 못했다. 살아있을 때 이미 그의 존재는 사라졌다. 공감(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공감함으로써 만 실재한다. 공감이 없는 존재는 감각되지 않으며, 감각되지 않는 것은 곧 사라진다.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되뇌인다. 너무 단순해서 의심스럽다. 하지만 반례를 찾지 못한다.




사랑받을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감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누군가 내 말을 끝까지 들을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을 때, 나는 존재한다고 느낀다. 반대로 무시당할 때 존재가 사라지는 듯하다. 투명 인간처럼. 말을 해도 아무도 듣지 않을 때,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나는 내가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공감의 유무가 존재감의 유무를 결정한다.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을 기억한다. 수백만 명의 의지와 반응이 결합하여 '국가적 존재감'을 형성한 순간. 우리는 모두 같은 리듬으로 함께 뛰었다. 함께 외쳤다. 그 순간 나는 한국이라는 존재를 체감했다. 개별적인 나는 사라지고, 거대한 우리가 생겼다. 그것은 집단 공감의 결과였다. 의지가 모였고, 반응이 증폭되었고, 존재가 선명해졌다.


SNS의 '좋아요' 문화. 존재의 반응성이 디지털 공감으로 대체된 사례. 우리는 게시물을 올리고 반응을 기다린다. 좋아요가 없으면 불안해진다. 댓글이 없으면 실망한다. 우리의 존재감은 이제 디지털 반응에 의존한다. 이것이 건강한가, 병적인가? 나는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관찰한다. 존재는 반응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태양의 빛 → 대지의 반응 → 생명의 발생. 태양은 빛을 보낸다. 대지는 그 빛을 받아 온도를 올린다. 물은 증발하고, 대기는 순환하고, 생명은 광합성을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반응의 연쇄다. 공감의 연쇄다. 공감이 단절된 우주 공간(진공)은 '죽음의 공간'이다.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고립, 외로움, 우울증 = 공감 단절의 결과. '나는 누구에게도 반응받지 못한다'는 감각 → '공감 부재' → '존재 소멸감'. 우울증을 앓고 있는 회사 동료와 대화한 적이 있다. "나는 출근 했지만,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 같아요. 투명해진 기분이에요." 그는 살아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에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공감의 회로가 끊어졌다.


화병, 자살 충동 등은 결국 "공감 회로의 붕괴"로 귀결된다.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 나는 이것을 공감 체계의 실패로 본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할 시간이 없다. 반응할 여력이 없다. 공감의 흐름이 약해진다. 그래서 존재가 희미해진다. 희미해진 존재는 스스로를 지운다.


전하의 상쇄. +와 -가 만나지 않으면 전류는 흐르지 않는다. 전기는 차이에서 발생한다. 전위차가 없으면 전류가 없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어야 반응이 있다. 완전히 같으면 반응이 없다. 완전히 다르면 반응이 없다. 적절한 차이, 적절한 거리, 적절한 긴장. 그 안에서 공감이 일어난다.


전자기적 고립. 자극이 없으면 입자는 정지 상태로 돌아간다. 에너지는 교환을 통해 흐른다. 교환이 멈추면 에너지도 멈춘다. 즉, 공감이 멈추면 에너지도 정지한다. 우주의 열죽음(heat death)을 생각한다. 모든 에너지가 균등하게 분산되어, 더 이상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그것이 진정한 죽음이다. 공감의 종말이다.


공감이 끊긴 순간, 존재는 의미를 잃는다. 존재는 반응의 지속이며, 반응이 멈추면 그것은 단순한 흔적이 된다.




세포 간 통신, 호르몬, 신경 전달물질 → 공감의 생물학적 형태. 내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공감을 하고 있다. 세포들이 서로에게 신호를 보낸다. 인슐린이 분비되고, 글루카곤이 반응한다. 혈당이 조절된다. 이것은 내 몸 안의 공감이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일어난다. 생물학적 죽음이란 공감의 정지, 공감 회로의 고장이다.


개미의 군집 행동, 벌의 춤, 새 떼의 이동 → '집단 공감 시스템'. 개미는 페로몬으로 소통한다. 벌은 춤으로 꽃의 위치를 알린다. 새 떼는 리더 없이도 완벽한 대형을 유지한다. 어떻게? 공감이다. 각자가 옆의 개체에 반응하여 행동한다. 그 반응이 모여 집단의 행동이 된다. 중앙 통제가 없다. 다만 반응의 연쇄가 있을 뿐이다. 집단성은 공감이 베이스이지만 공감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역설을 가진다.


분자 결합. 전자의 공유 → 공감의 전자적 형태.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된다. 왜? 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수소는 전자를 하나 가지고 있고, 산소는 전자를 여섯 개 가지고 있다. 산소는 두 개가 더 필요하다. 수소는 하나를 나눠줄 수 있다. 이 필요와 제공의 의지들이 만나 반응하여 결합이 일어난다. 이것이 공감이다. 분자 수준의 공감이다. 공감없이는 물이 될 수 없다.


물의 결합력, 결정 구조, 상호 인력 → '공감력(E)'의 표현. 물은 왜 표면장력을 가지는가? 분자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왜 끌어당기는가? 수소 결합 때문이다. 수소 결합은 약한 결합이다. 하지만 무수히 많다. 약한 공감이 무수히 모이면 강한 힘이 된다. 이것이 공감의 창발이다. 그렇게 바다가 되어 생명의 보고가 된다.


생태계는 '순환적 공감 구조'다. 생명과 비생명, 유기와 무기 모두 에너지 교환을 통해 반응한다.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놓는다. 동물은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를 내놓는다. 이것은 교환이다. 공감의 순환이다. 나무와 동물은 서로에게 반응한다. 의식적 동기는 없다. 하지만 결과는 있다. 순환이 일어난다. 그들은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


바람은 온도의 불균형에 대한 공감의 반응이다. 뜨거운 곳과 차가운 곳이 있으면, 공기가 움직인다. 왜? 균형을 맞추려는 경향 때문이다. 이것도 공감이다. 우주는 균형을 원한다. 불균형에 반응한다. 그 반응이 바람이고, 해류이고, 날씨다.


중력. 모든 질량이 서로를 향해 반응하는 가장 오래된 공감의 형태. 중력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작동한다. 지구는 태양을 향한다. 달은 지구를 향한다. 사과는 땅을 향한다. 이 모든 것이 중력이다. 그리고 중력은 공감이다. 질량이 있으면, 서로를 향한다. 피할 수 없다.


전자기력·핵력 등 우주의 4대 힘 → 모두 '존재 간 반응'을 전제로 한다. 힘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두 개 이상의 존재가 있어야 힘이 발생한다. 힘은 관계다. 힘은 반응이다. 힘은 공감이다. 우주는 거대한 공감 네트워크다. 그렇게 우주는 탄생한다.


모든 것을 공감으로 설명하려는 이 시도가 과연 타당한가? 환원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가? 나는 모른다. 다만 본다. 그리고 기록한다.




존재는 공감의 함수가 된다. 존재 = 공감(의지, 반응). 의지에 반응하여 공감하며 존재한다. 공감의 정도에 따라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지 못할 수 도 있지만 공감의 여운은 존재를 결정한다. 즉, 존재는 공감의 농도에 따라 달라진다. 공감이 낮으면 존재는 흐릿해지고, 공감이 높으면 존재는 뚜렷해진다. 이것은 수학적 표현이 목적은 아니다. 비유다. 하지만 유용한 비유다. 존재는 있거나 없거나도 중요하지만 정도의 문제도 있다. 희미하거나 선명하거나.


고등학교 친구를 오랫만에 만났을 때, 그는 선명하다. 매일 마주치는 동료는 희미하다. 왜? 공감의 강도 차이다. 오랜 친구에게는 더 많이 반응한다. 더 많이 집중한다. 더 많이 느낀다. 그래서 그는 더 선명하게 존재한다. 동료는? 얕은 관계가 습관이 되었다. 반응이 약하다. 깊은 공감은 없다. 그래서 희미하다. 이것이 존재의 농도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공감의 농도에 따라 드러나는 현상이다.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뒤집어본다. 불편하다. 너무 상대적이다. 하지만 정확하다고 느낀다. 존재는 절대적이지 않다. 관계적이다. 반응적이다.




기존 철학은 '존재'를 인식 주체(인간)의 내부 문제로 다루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칸트의 선험적 자아(경험에 앞서 존재하는 자아), 후설의 현상학(인간의 왜곡없는 의식과 경험 분석). 모두 인간의 의식 안에서 존재를 찾았다. 그러나 공감이론은 '존재'를 상호 작용의 결과로 본다.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를 "공감-내-존재"로 확장한다. 나는 세계 안에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공감 안에 있다. 공감 없이는 세계도 없다. 세계는 반응과 공감을 통해서만 나에게 드러난다. 반응이 없으면, 세계는 추상이다. 공감이 세계를 구체화한다.


"공감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 (Existence is realized through empathy)"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이것이 내가 제안하는 존재론이다. 생각이 아니라 공감이 존재를 증명한다. 공감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고 공감의 힘이 강해질 때 존재도 선명해진다. 세상 만물은 서로의 공감 속에서만 존재한다.


존재가 공감에 의해 결정된다면, 모든 생명은 서로의 존재 조건이다. 나는 너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너는 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의존이 아니다. 상호 구성이다. 우리는 서로를 만든다. 서로를 드러낸다.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 나를 있게 해준 건 너희들이자 우리다.




그렇다면,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가? 공감 능력이 약한 인간은 존재가 희미한가? AI는 공감이 없으니 존재가 아닌가? 나는 그 질문 앞에서 머뭇거린다. 왜냐하면 존재는 여전히 내 감각 안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을 생각한다. 그들은 공감이 어렵다고 말한다. 타인의 감정을 읽기 어렵다고. 하지만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존재한다. 다만 공감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우리가 읽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세상과 반응하고 공감한다.


인공지능을 생각한다. AI는 공감하는가? 정의에 따라 다르다. 감정이 없으니 공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반응을 하고 답을 한다. 입력에 대해 출력을 낸다. 이것을 공감으로 볼 수 있는가?


식물을 생각한다. 식물은 공감하는가? 감정은 없다. 하지만 반응은 한다. 빛을 향하고, 물을 찾고, 상처를 치유한다. 이것을 공감으로 볼 수 있다면, 공감의 정의는 훨씬 넓어진다. 감정이 아니라 반응으로.


앞장에서 언급한대로 공감의 재정의 해야만 풀어지는 문제다. 인간 중심의 해석력을 넘어 의지에 반응하는 공감으로 재정의 하자. 단순하면서도 기본적인 원리로 이해해보자.


아마도 존재란, 다양하고 복잡한 공감일 것이다. 그렇게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하나의 현상일지도 모른다.


존재는 매트릭스적 스펙트럼이다.


희미한 존재도 있고, 선명한 존재도 있다. 공감의 강도에 따라 존재의 명확성이 달라진다. 이것이 내가 도달한 잠정적 결론이다.




공감은 존재의 전제다. 공감이 없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이 두 문장을 나는 선언한다. 하지만 선언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반례가 있을 것이다. 예외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기록한다.


지하철은 계속 달린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여기 있다. 공감 없이도, 우리는 존재한다. 아니, 정말 그런가? 우리는 정말 공감 없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미세한 공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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