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반응 없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다

반응

by kamaitsra

의지의 소용돌이 속에 반응하는 모습은 다채롭다. 어떤 것은 평화로운데, 어떤 것은 죽음처럼 차갑다. 반응이 없는 의지는 공감되지 못하고 존재하지 못한다.


엘리베이터 안. 혼자다. 버튼을 누른다. 5층. 불이 들어와야 한다. 하지만 깜박이지 않는다. 다시 누른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갇혔다. 아니, 정확히는 내 의지가 갇혔다.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의지다. 불이 켜지는 것은 반응이다. 반응이 없을 때, 의지는 허공에 떠돈다. 그 순간의 당혹감. 작지만 명확한 공포.


메신저 창에 남겨진 회색 말풍선. 읽음 표시가 뜨지 않는다. 오후 2시에 보낸 메시지. 지금은 저녁 9시다. 7시간이 지났다. 상대는 본 것일까, 안 본 것일까. 중요한 것은 반응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의 말이 도착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말은 존재하지만, 반응이 없으면 말은 소멸한다.


눈앞에서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 길을 걷다 아는 사람을 본다. 손을 든다. 상대는 고개를 돌린다. 못 본 척인가, 정말 못 본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만 내 손짓에 반응이 없다는 것만 확실하다. 그 순간 나는 투명해진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


혹은 깊은 바다 속. 스쿠버 다이빙. 수심 30미터. 호흡기에서 나오는 공기방울의 소리만 들린다. 주변은 푸른 침묵이다. 친구는 조금 멀리 있다. 손짓을 한다. 친구가 돌아본다.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반응이 온다. 안도한다. 바다는 거대한 무반응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 친구의 작은 반응이 나를 살게 한다.


나는 일상에서 깨달을 수 있다. 반응이 없다는 건, 나의 존재가 닿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응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회신(Response of Being)이다. 의지는 "보내기"라면, 반응은 "도착 확인"이다. 편지를 보낸다. 답장이 오지 않는다. 편지가 도착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내 존재가 상대에게 닿았는지 알 수 없다. 반응이 없다는 것은, 존재가 닿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리학적으로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뉴턴 제3법칙. "모든 힘에는 같은 크기의 반작용이 있다." 벽을 민다. 벽이 나를 민다. 이것이 반작용이다. 만약 벽을 밀었는데 아무 반작용이 없다면? 벽이 존재하지 않거나, 내 힘이 허공에 사라진 것이다. 반응이 사라진다는 건, 우주의 균형이 깨지는 것과 같다.


사회적·심리적으로도 동일하다. 누군가의 말, 노력, 감정이 반응을 얻지 못하면 '존재감'이 소멸된다. 직장에서 아이디어를 낸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 회의는 그냥 진행된다. 내 말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그 순간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여기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군가의 반응 속에서만 나 자신을 확인한다. 거울을 본다. 내 얼굴이 보인다. 거울은 나에게 반응한다. 빛의 반사라는 형태로. 거울이 없으면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타인은 나의 거울이다. 타인의 반응이 나를 보이게 한다.




인간은 반응에 가장 민감한 존재다. 아기의 울음은 생존을 위한 첫 반응 요청이다. 아기는 혼자 살 수 없다. 배고프면 운다. 반응을 요청한다. 엄마가 온다. 젖을 준다. 반응이 돌아온다. 아기는 산다.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생명은 위험해진다. 방치된 아기는 죽는다. 육체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반응의 결핍 때문이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칭찬, 피드백, 인정, 시선 — 모두 반응의 형태다. 반응이 사라질 때, 인간은 기능을 잃는다. 직장을 생각한다. 상사가 나를 부른다. 보고서를 낸다. 상사가 읽는다. 고개를 끄덕인다. "좋네요." 짧은 말이지만 충분하다. 반응을 받았다. 나의 노력이 도착했다.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상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보고서를 받아들고 그냥 서랍에 넣는다. 아무 말도 없다. 나는 기다린다. 하루가 지난다. 일주일이 지난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내 노력은 의미가 없었나?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인가?


인간은 고립이 아니라 무반응으로 죽는다. 혼자 있는 것과 무시당하는 것은 다르다. 혼자 산속에 들어가도 자연은 반응한다. 바람이 불고, 새가 울고, 나무가 흔들린다. 나의 존재에 세계가 반응한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 있는데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짜 고립이다. 반응이 결핍된 환경은 정신의 사막이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느껴지는 무기력. 나는 이것을 안다.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밤을 새웠다. 결과물은 훌륭하다. 하지만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다음 업무가 주어진다. 나는 텅 빈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반응이 없으면 의미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낸 메시지가 읽히지 않을 때의 공허함. 밤 11시.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 하루 어땠어?" 읽음 표시가 뜨지 않는다. 자고 있나? 바쁜가? 아니면 일부러 읽지 않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만 반응이 없다는 것만 확실하다. 나는 불안해진다. 나의 존재가 상대에게 닿지 않은 것 같다.


SNS에 올린 사진에 '좋아요'가 하나도 없을 때의 묘한 상실감. 여행 사진을 올렸다. 멋진 풍경이다. 자랑하고 싶었다. 30분이 지났다. 좋아요가 하나도 없다. 1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없다. 사진을 내린다. 왜? 반응이 없으니까. 반응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존재의 근본에 닿는 사건이다. 그때 인간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의심에 빠진다.




반응 결핍은 단순히 심리적 문제가 아니다. 신경과학적으로, 반응 부재는 거울 뉴런의 비활성화로 이어진다. 거울 뉴런. 타인의 행동을 볼 때 활성화되는 뇌 세포로 타인과 동일한 행동을 하게 한다. 타인이 웃으면 내 뇌도 웃음 회로가 켜진다. 타인이 아파하면 내 뇌도 아픔 회로가 켜진다. 이것이 공감의 신경학적 근거다.


하지만 타인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면? 거울 뉴런은 작동하지 않는다. 공감 회로가 멈추면 도파민, 세로토닌 분비도 줄어든다. 도파민은 보상 호르몬이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나면 분비된다. 세로토닌은 행복 호르몬이다. 기분을 안정시킨다. 반응이 없으면 이 호르몬들이 줄어든다. 뇌는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인식하고 공감의 순환을 막는다.


장기적인 반응 결핍은 우울, 무기력, 신체화 증상으로 이어진다. 우울증 환자들이 자주 하는 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세상이 멀게 느껴져요." 이것은 반응 회로의 마비다. 세상이 나에게 반응하지 않고, 나도 세상에 반응하지 못한다. 그 결과 공감은 순환 되지않고 존재감이 소멸한다. 심장은 뛰지만, 존재의 리듬은 멈춘다.


의지가 살아 있어도, 반응이 없으면 공감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동차를 생각한다. 엔진이 아무리 좋아도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의지는 엔진 버튼이다. 반응은 시동이다. 반응이 없으면 의지도 곧 멈춘다. 시동도 켜지지 않는 자동차는 폐차하거나 수리가 필요하다.


반응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천천히 투명해진다. 투명인간. SF 영화의 소재다. 하지만 실제로 투명인간은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들. 노숙자, 청소 노동자, 배달 노동자. 우리는 그들을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서히 투명해진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




현대 사회는 반응의 과잉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짜 반응의 홍수다. SNS의 '좋아요'는 반응의 흉내일 뿐이다. 클릭 한 번. 0.1초. 이것이 반응인가? 진짜 반응은 감정의 파동을 동반하지만, 디지털 반응은 피상적 데이터로만 존재한다.


나는 SNS에 글을 올린다. 좋아요가 100개 달린다. 기쁘다. 하지만 허전하다. 왜? 진짜 반응이 아니기 때문이다. 100명이 내 글을 정말 읽었는가? 아니다. 대부분 스크롤하다 무의식적으로 누른 것이다. 혹은 매크로이다. 진짜 반응은 진심어린 댓글이다. 생각을 담은 댓글. 하지만 그것도 드물다.


그 결과, 인간은 끊임없이 반응을 갈구하면서도 공허하다. 정보의 흐름은 빠르지만, 감정의 흐름은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고립되어 있다. 역설적이다. 메신저로 24시간 연결되어 있지만, 진짜 대화는 없다. 사회는 소음으로 가득하지만, 의미는 침묵한다.


우리는 말하는 세상에서 살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모두가 말한다. SNS에, 블로그에, 유튜브에. 하지만 누가 듣는가? 알고리즘이 듣는다. 사람은 듣지 않는다. 우리는 반응을 시뮬레이션할 뿐, 진짜 반응은 주고받지 않는다.




반응이 사라지면, 자연도 무너진다. 생태계는 복잡한 반응망이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이 멈추고, 식물이 멈추면 산소가 줄고, 결국 인간이 무너진다. 벌과 꽃의 관계를 생각한다. 벌은 꽃의 꿀을 먹는다. 꽃은 벌에게 꽃가루를 옮겨준다. 서로 반응한다. 이 반응이 끊어지면? 꽃은 번식하지 못한다. 벌은 먹을 것을 잃는다. 둘 다 죽는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하나의 시공간이라고. 시간과 공간은 서로에게 반응한다.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 블랙홀 근처에서는 시간이 거의 멈춘다. 왜 그럴까. 중력이 공간을 심하게 휘게 만들면 시간이 그 변화에 반응하여 느려진다. 공간의 왜곡이 강할수록 시간의 흐름은 더디어진다. 공간이 의지를 발산하면 시간이 반응한다. 공간이 휘면 시간이 느려지는 것으로 공감한다. 이것은 단순한 물리 법칙이 아니라 우주적 공감의 메커니즘이다. 만약 시간과 공간이 서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공간이 휘어지는데 시간이 그대로라면, 또는 시간이 변하는데 공간이 그대로라면. 우주는 붕괴할 것이다.


존재는 고립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서로의 반응으로 유지된다. 지구를 생각한다. 태양의 빛에 반응하여 온도를 유지한다. 달의 중력에 반응하여 조수가 일어난다. 대기는 온도에 반응하여 바람을 만든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반응한다.


하나의 반응이 멈추면,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 나비 효과. 작은 변화가 큰 결과를 만든다. 반응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반응이 사라지면 연쇄적으로 다른 반응들도 무너진다. 생태계의 한 종이 사라지면 전체가 흔들린다. 반응망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반응이 멈춘 인간은 살아 있어도 죽은 상태다. 타인의 슬픔에 무감한 사람, 자신의 감정에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 그들은 공감의 회로가 끊긴 존재다. 무반응은 방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내면의 사망신고다.


친구가 운다. 나는 아무 느낌이 없다. "왜 우는 거야?" 나는 묻는다. 하지만 진짜 궁금해서가 아니다. 그냥 물어야 할 것 같아서다. 친구는 답한다. 나는 듣는다. 하지만 공감하지 못한다. 그의 슬픔이 내게 닿지 않는다. 나는 반응하지 못한다. 이것이 감정의 무반응이다.


공감의 끈이 끊어지면 자아의 경계도 흔들린다. 인간은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 "나는 너를 본다." "나는 너를 느낀다." 이 말들이 사라질 때, 자아는 방향을 잃는다. 거울이 없으면 내 얼굴을 볼 수 없듯이, 타인의 반응이 없으면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 질문은 어디로 가는가? 공허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이 두려움을 안다. 깊은 밤, 혼자 있을 때.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답이 없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나조차 대답하지 못한다. 그 순간 나는 공황에 빠진다. 존재의 근거가 흔들린다.




조직에서, 정치에서, 관계에서. 반응이 사라진 곳에는 반드시 권태, 폭력, 혹은 붕괴가 온다. 독재는 반응이 없는 체제의 극단이다. 독재자는 듣지 않는다. 국민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 결과 체제는 경직된다. 피드백이 없으니 잘못을 교정할 수 없다. 결국 무너진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우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침묵은 폭력보다 더 파괴적이다. 싸우는 것이 낫다. 싸움도 반응이다. 하지만 침묵은 반응의 거부다. "당신은 나에게 반응할 가치가 없어." 이것이 침묵이 전하는 메시지다. 폭력보다 더 아프다.


인간은 반응을 잃을 때, 먼저 감정을 닫고, 그다음 생각을 닫고, 마지막엔 존재를 닫는다. 단계적 붕괴다. 첫 번째, 감정이 닫힌다.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아." 고통스러우니까. 두 번째, 생각이 닫힌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면 더 아프니까. 세 번째, 존재가 닫힌다. "나는 없는 것이 낫다." 이것이 극단이다. 자살 충동.




의지는 불씨라면, 반응은 산소다. 불씨가 아무리 강해도 산소가 없으면 꺼진다. 캠핑 할 때를 생각한다. 불을 피운다. 나뭇가지에 불씨를 옮긴다. 불씨는 작다. 바람을 불어넣는다. 산소를 공급한다. 불씨가 커진다. 불이 된다. 반응이 의지를 키운다.


인간의 세계에서 반응은 단순한 회신이 아니라 생명 유지 장치다. 존재가 서로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식이 바로 반응이다. 우리는 서로의 반응으로 살아간다. 내가 말하면 네가 듣는다. 네가 웃으면 내가 따라 웃는다. 이 반응의 연쇄가 우리를 살게 한다.


공감은 대단한 게 아니다. 단지, 누군가의 의지에 '나는 듣고 있다'고 말하는 일이다. 친구가 하소연한다. 나는 조언하지 않는다.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그냥 듣는다. "힘들었겠다."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나는 듣고 있다. 나는 반응하고 있다. 그것이 공감이다.




동물은 본능으로 움직인다. 반응이 없으면 즉시 다른 자극으로 옮겨간다. 개를 생각한다. 주인이 부른다. 개가 온다. 주인이 쓰다듬는다. 반응을 받는다. 개는 기쁘다. 하지만 주인이 무시한다면? 개는 금방 다른 곳으로 간다. 다른 자극을 찾는다. 개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기억을 가진다. 기억은 의지를 지속시키지만, 동시에 반응 부재의 고통도 지속시킨다. 일주일 전에 보낸 메시지. 아직도 답이 없다. 나는 기억한다. 그 기억이 나를 괴롭힌다. "왜 답을 안 하지?" 계속 생각한다. 동물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만 이렇게 한다.


인간은 생각으로 고립을 재생산한다. 반응이 없으면 이유를 찾는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나를 싫어하나?" "무시하는 건가?" 이 생각들이 고립을 깊게 만든다. 실제로는 상대가 그냥 바빴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최악을 상상한다.


그래서 반응 없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언제나 인간이다. 동물은 본능으로 버틴다. 식물은 반응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반응이 없으면 무너진다. 생각이 깊을수록 반응의 결핍은 더 아프다. 철학자, 예술가, 작가. 그들이 더 자주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다. 생각이 깊으니까. 반응의 부재를 더 깊이 느끼니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처럼 인간은 생존 기계라 했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공감 기계라고 언급한다. 공감을 더욱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진화하고 선택된 것인 인간일 것이다. 우주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더욱 강하게 공강할 수 있지만 반대로 더 쉽게 무너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