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소용돌이

의지

by kamaitsra

나는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왜 어떤 것은 움직이려 하고, 어떤 것은 멈추려 하는가.


산책길 호숫가에서 잉어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순간. 꼬리지느러미가 물을 밀어내기 직전의 그 찰나. 무언가가 결정되었다. 무엇이? 나는 모른다. 다만 느낀다. 그 순간에 '의지'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작동했다는 것을.


새벽 출근길, 시동이 걸리기 전의 자동차. 잠깐의 정적 후 울리는 점화음. 엔진이 깨어나는 소리. 기계에도 의지가 있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 순간의 긴장,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그 떨림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태양이 떠오르기 전의 희미한 붉은빛. 지평선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순간. 아직 태양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나려 한다는 것을 안다. 이 모든 장면에는 '무언가 일어나려는 기운'이 있다. 그 순간의 긴장, 그 미세한 떨림이 바로 '의지의 온도'다.


의지는 관찰되지 않지만, 모든 움직임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작을 '의지'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은가? 나는 여전히 망설인다. 하지만 달리 부를 이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불확실한 단어를 붙잡고 간다.




우주의 모든 변화는 '정적에서 동적'으로의 전환으로 시작된다. 그 전환의 첫 미세한 요동, 양자적 흔들림을 물리학은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이라 부른다. 무(無)에서 입자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는 없음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존재하려는 의지의 첫 반응'이라 부르고 싶다. 과학자들은 비웃을 것이다. 의인화의 오류라고. 하지만 나는 그 요동 속에서 무언가를 본다. 존재하려는 충동.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가 되려는 몸부림.


무(無)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지만 그 안에도 '존재하고자 하는 가능성'이 응축되어 있다. 의지는 이 가능성의 폭발이다. 의지는 무의 침묵 속에서 태어났다. 질량도 파동도 아니다. 물리적 실체, 관측 가능한 수치는 존재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존재하게 하려는 첫 몸부림이었다.




의지는 증거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부재는 곧바로 감지된다. 물은 흐르고, 바람은 움직이고, 생명은 꿈틀거린다. 우리는 그 운동을 통해 의지를 본다. 운동이 멈춘 것을 보면, 의지가 사라졌다고 느낀다.


죽은 물고기를 본 적이 있다. 수면에 떠 있는 몸. 움직임이 없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의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안다. 움직이지 않는 것과 움직일 수 없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에는 의지가 있고, 후자에는 없다.


존재가 있다는 것은 곧, 의지가 작동 중이라는 뜻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계속해서 '의지를 발생시키는 중'이라는 의미다. 호흡을 생각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리듬. 멈추면 죽는다. 왜 호흡하는가? 살기 위해서. 왜 살려고 하는가? 그것이 의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춘다. 이 순환 논리가 불편하다. 하지만 벗어날 방법을 모른다. 의지는 그 자체로 시작이다. 원인을 물을 수 없는 최초의 원인.




의지는 언제나 부족함에서 출발한다. 더 가지고 싶어서, 더 알고 싶어서, 더 존재하고 싶어서 생긴다. 배고픔을 생각한다. 위가 비었을 때 느끼는 그 공허함. 그것이 먹으려는 의지를 만든다. 배가 부르면 의지가 사라진다. 의지는 결핍의 산물이다.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의지는 균형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왜? 중력 때문이라고 물리학은 말한다. 나는 묻는다. 중력도 일종의 의지가 아닌가? 질량이 질량을 향하려는 경향. 그것을 의지라고 부를 수 없는가?


인간의 욕망, 식물의 성장, 별의 탄생까지 모두 결핍이 낳은 반응이다. 식물은 빛이 부족하면 줄기를 길게 뻗는다. 햇빛을 향한 의지. 별은 수소가 부족하면 헬륨을 태운다. 존재를 유지하려는 의지. 인간은 의미가 부족하면 철학을 만든다. 이해하려는 의지.


결핍이 없다면 의지도 없다. 완벽한 균형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열역학 제2법칙을 생각한다.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모든 에너지는 결국 균등하게 분산된다. 그 상태를 열적 평형이라고 한다. 그것은 우주의 죽음이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의지가 소멸한 상태.


의지는 불균형의 언어다. 존재는 그 불균형을 통해 진화한다.




의지는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다. 방향을 가진 에너지다. 물리학에서 벡터(Vector)는 크기와 방향을 함께 가진다. 속도는 벡터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를 함께 담는다. 의지는 존재의 벡터다.


불은 위로 타오르고, 물은 아래로 흐르고, 바람은 압력차를 따라 움직인다. 모두 방향성을 지닌 에너지다. 불이 아래로 타오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력과 밀도의 차이 때문이라고 과학은 말한다. 나는 이것을 '불의 의지가 위를 향하기 때문'이라고 읽는다. 과학적 설명과 의지적 해석은 대립하지 않는다. 같은 현상을 다른 언어로 말할 뿐이다.


생명은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인간은 의미를 향해 움직인다. 의미는 방향의 또 다른 표현이다. 내가 등산을 하는 이유. 정상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왜 정상에 가려고 하는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의미는 방향을 만든다. 방향이 있으면 의지가 생긴다.


의지는 움직임이 아니라, 움직이려는 이유다. 움직임은 결과다. 의지는 원인이다. 하지만 의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움직임을 보고, 역으로 의지를 추론한다. 이것이 인간 인식의 한계다. 원인을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결과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의지는 결코 고립되지 않는다. 하나의 의지는 또 다른 의지를 일으킨다. 씨앗의 의지가 흙의 반응을 얻고, 그 반응은 햇빛을 끌어들인다. 씨앗은 싹을 틀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다. (정확히는 '싹을 틀 수 있는 조건에 반응한다'고 말해야겠지만, 나는 이것을 의지로 읽는다.) 흙은 수분과 양분을 제공한다. 햇빛은 에너지를 준다. 이 모든 것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사람의 의지가 다른 사람의 의지를 깨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생각한다.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의지가 제자의 배움에 대한 의지를 일으킨다. 의지는 전염된다. 열정은 다른 사람의 열정을 불러온다. 무기력도 마찬가지다. 무기력은 의지의 부재가 다른 사람의 의지를 소멸시킨다.


의지는 연쇄적이다. 이는 생명의 계보이자, 진화의 동력이다. 진화를 생각한다. 한 종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의지(정확히는 적응 압력)가 돌연변이를 선택한다. 그 돌연변이가 다음 세대의 의지를 바꾼다. 이렇게 의지는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


과학자는 자연의 의지(법칙)에 반응하여 새로운 의지를 만든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했다. 자연의 법칙이 뉴턴의 의지를 자극했다. 뉴턴의 발견은 다른 과학자들의 의지를 자극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 이론을 확장했다. 의지는 계속 이어진다.


부모의 의지는 자녀의 의지로 이어진다. 내 아버지는 평생 성실하게 일했다. 그 성실함이 나에게 전해졌다. 의식적으로 전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성실함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의지는 유전자처럼 전달된다.


별의 폭발은 새로운 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초신성 폭발. 거대한 별이 죽으면서 우주 공간에 무거운 원소들을 퍼뜨린다. 그 원소들이 모여 새로운 별을 만든다. 죽음이 탄생을 낳는다. 모든 의지는 다음 의지를 잇는다.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만 바뀐다.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의지도 보존된다. 소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형태로 변환될 뿐이다.




인간의 의지는 단순한 생존 충동을 넘어선다. 인간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는 배고프면 먹는다. 하지만 개는 '왜 내가 먹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인간은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이 가능한 순간, 의지는 질적으로 변한다.


의지는 자각으로부터 진화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모든 것은 목적(causa finalis)을 향한다." 돌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장소로 돌아가려는 목적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물리학이다. 하지만 사고방식으로는 흥미롭다.) 목적을 자각할 수 있는 순간, 의지는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것이 인간만의 의지의 고유성이다. 동물은 살기 위해 움직이지만, 인간은 이유를 찾기 위해 움직인다. 주식투자를 생각한다. 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다.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왜 더 나은 삶을 원하는가? 행복하기 위해서. 왜 행복해지려고 하는가? 이 질문은 끝이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의지가 정제된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의지는 자유로운가?


우리는 의지를 자유의 상징처럼 여기지만, 실제로는 조건에 묶여 있다. 나의 의지는 나의 신체, 환경, 사회적 맥락 속에서만 작동한다. 나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날 수 없다. 신체적 조건이 허락하지 않는다. 의지가 있다고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완전히 자유로운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베트(Benjamin Libet)의 실험을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했다. 뇌파를 측정했더니, 의식적으로 결정하기 전에 이미 뇌가 반응하고 있었다. 우리가 '내가 결정했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뇌는 결정을 내린 후다. 자유 의지는 착각인가?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제약 속에서 의지는 더 강해진다. 바람은 저항이 있어야 불고, 파도는 해안이 있어야 일어난다. 바람이 진공 속에서는 불지 않는다. 저항이 필요하다. 파도도 마찬가지다. 해안선이라는 경계가 있어야 파도가 부서진다.


완전한 자유는 무의미이고, 제약은 의지의 촉매다. 스쿠버 다이빙을 할 때를 생각한다. 물속에서는 움직임이 제한된다. 공기 중보다 느리다. 하지만 그 제약이 오히려 움직임을 더 의도적으로 만든다. 한 번 한 번의 핀 차기가 더 중요해진다. 제약이 의지를 선명하게 만든다.


의지는 억압을 먹고 자란다. 금지가 욕망을 키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다. 이것은 단순한 반항심이 아니다. 의지의 본성이다. 의지는 저항을 만나야 강해진다.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의지는 '선택의 예측 과정'이다. 인간의 뇌는 행동하기 전 이미 미세한 전기신호를 보낸다. 이는 우리가 의식을 느끼기 전에 일어난다. 전두엽이 먼저 반응하고, 그 다음 의식이 따라온다. 즉, 의지는 무의식의 층위에서 먼저 발생한다.


이것이 불편하다. 내가 결정한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뇌가 먼저 결정하고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라니. 나는 누구인가? 뇌인가, 의식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멈춘다.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입자는 '관찰되기 전까지' 여러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안의 고양이는 관찰되기 전까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다. 관찰의 행위가 입자의 상태를 결정한다.


이 또한 하나의 의지-반응 구조다. 관찰자의 '의지'가 입자의 '반응'을 만들어낸다. 물론 양자역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읽는다. 관찰은 수동적 행위가 아니다. 능동적 개입이다. 우주마저 의지적이다. 우주는 관찰자의 의지에 반응한다.




현대 물리학은 우주를 '정보의 장'으로 본다. 존 휠러(John Wheeler)는 "It from bit"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It)은 정보(bit)로부터 나온다. 물질은 정보의 응축이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와 정보의 교환 속에서 움직인다.


의지는 정보를 생성하려는 첫 행동이다. 정보가 곧 '의지의 흔적'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의지의 흔적이다. 이 문장들은 내 의지가 정보로 변환된 것이다. 우리가 남긴 데이터, 언어, 기억. 이 모든 것이 의지의 잔향이다.


결국 우주는 의지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의지가 또 다른 정보를 부르고, 그 정보가 다시 새로운 의지를 일으킨다. 인터넷을 생각한다. 한 사람이 글을 쓴다. 그 글이 다른 사람의 의지를 자극한다. 그 사람이 댓글을 단다. 댓글이 또 다른 사람을 자극한다. 의지는 정보를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온다. 의지는 왜 발생하는가?


나는 단 하나의 답에 다다른다. 존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무(無)에서 유(有)가 태어난 이유는, 존재하려는 충동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공리다. 믿음이다. 하지만 나는 논리적으로는 증명할 수 있다. 앞서 의지에 반응하여 공감한다고 했다. 이후 공감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했다. 흐름의 출발점은 의지이고 도착점은 존재이다. 따라서 의지는 존재하고자 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존재하려는 충동은 생명에도, 물질에도, 인간의 생각에도 내재되어 있다. 박테리아는 왜 분열하는가?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서. 원자는 왜 결합하는가? 안정된 상태로 존재하기 위해서. 인간은 왜 생각하는가? 의미 있게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는 우연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의지'의 결과다. 빅뱅이 우연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연은 설명의 포기다. 우연이라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는 계속 묻고 싶다. 왜? 그리고 나는 답한다. 존재하려는 의지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기 위해 의지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것은 순환 논리다. 하지만 모든 근원적 진리는 순환적이다. 빛은 빠르기 때문에 빛이다. 존재는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의지는 의지하기 때문에 의지다.




의지는 모든 공감의 시작점이다. 공감은 의지의 반응이며, 존재는 공감의 누적이다. 모든 것은 의지에서 시작되었고, 의지로 돌아간다. 세상은 거대한 의지의 순환 구조 속에서 숨 쉬고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내 안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글을 쓰려는 의지. 생각을 정리하려는 의지.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의지. 이 모든 의지가 지금 이 순간 나를 움직이고 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화면을 응시하는 눈, 다음 문장을 찾는 뇌. 모두 의지의 표현이다.


의지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중력이 물체를 끌어당기고, 전자기력이 입자를 묶고, 핵력이 원자를 유지하지만, 그 모든 힘의 근원에는 의지가 있다. 존재하려는 의지. 계속되려는 의지. 변화하려는 의지.


그렇다면, 나의 의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내가 사라진 뒤에도, 그 의지는 계속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짐작한다. 내 의지는 부모로부터 왔고, 부모의 의지는 그들의 부모로부터 왔다. 생명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생명에 도달한다. 그 생명의 의지는 어디서 왔는가? 무기물에서 왔다. 무기물의 의지는? 우주의 탄생에서 왔다. 우주의 의지는? 모른다. 여기서 사고가 멈춘다.


내가 사라진 뒤에도 의지는 계속될 것이다. 내 자녀에게, 내가 쓴 글에, 내가 만난 사람들의 기억에. 의지는 형태를 바꾸며 계속된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