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에너지장의 순환
새벽 다섯 시, 등산로 입구에 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서 숨이 차올랐다. 예전에는 이 정도 오르막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발걸음을 떼는 속도가 달라졌다. 생각을 지우고 나이 듦을 애써 부정하려 쉬지 않고 입 다물고 코로 숨 쉬어 급히 올랐다.
하산 시에는 더욱 티가 났다. 숨기고 싶지만 무릎 바깥쪽 통증은 보기 좋게 배반했다. 무릎 보호대를 미리 사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계단이 끝나지 않음을 원망했다. 20대에는 이런 게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느끼지 못했다. 느낄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정상만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했다. 불편했지만, 어렸을 때는 나의 걸음만, 산봉만 기억 난다. 오로지 남보다 빠르게 오르고자 하는 마음에, 나의 풀풀 끓는 에너지에만 집중했다. 주변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오른 사람도, 지나친 꽃도, 스친 바람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숫자만 기억난다. 몇 시간 만에 올랐는지, 누구보다 빨랐는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산 냄새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흙 냄새, 나무 냄새, 풀 냄새가 각각 달랐다. 꽃이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지 몰랐다. 산벚나무 꽃이 지고 철쭉이 피어났다. 산벌레도 많았다. 송충이도, 쇠똥벌레도. 예전에는 방해물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함께 사는 존재들이었다.
바람 소리가, 계곡 소리가 반가웠다. 물소리의 높낮이가 계곡의 깊이를 알려주었다. 함께 걷는 이의 든든함이 좋았다. 말없이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누가 먼저 오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오르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건 뭘까. 잃어버리는 것일까, 얻는 것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젊음이 사라지는 것을, 힘이 빠지는 것을, 기억이 흐려지는 것을. 마치 뭔가 잃어버리는 것처럼. 광고는 끊임없이 외친다. 노화 방지, 안티에이징, 젊음 유지. 마치 나이 드는 것이 질병인 것처럼.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최근 몇 년간 이상한 경험을 했다. 20대에 열광했던 것들이 40대에는 별로 끌리지 않았다. 연애의 광란, 사랑의 열병, 밤새 술 마시고 노래하던 그 시절. 당시에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그게 없으면 삶이 아닌 줄 알았다.
30대에 집착했던 것들이 지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 성공을 증명하는 것, 돈을 더 버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그것들을 위해 밤을 새우고, 관계를 희생하고, 건강을 담보로 잡았다. 그때는 그게 의미라고 믿었다.
대신 무언가 사라진 게 아니라, 다른 것이 채워지고 있었다. 여유. 안정. 깊은 사유. 내면과의 대화. 침묵을 견디는 힘.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평온. 이런 것들은 20대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30대에는 갈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40대에는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스물에 관례를 치르고 어른이 되었으며, 서른에 섰고, 마흔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에 귀가 순해졌고, 일흔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중학교 한문 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적으신 문장. 그냥 나이 드는 순서를 나열한 것 같았다. 지혜로운 말이라고들 하지만, 그게 내 삶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건 변화의 순서가 아니었다. 공감 에너지장이 변화하는 방향이었다. 의지가 어떻게 점화되고, 반응이 어떻게 확장되고, 공감이 어떻게 깊어지고, 존재가 어떻게 완성되는가에 대한 정밀한 관찰이었다.
공자는 2500년 전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지금도 작동한다. 아니, 영원히 작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 공감 에너지장의 보편적 순환 구조이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나이의 단계들을 다시 본다. 공자의 말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이제는 다르게 읽힌다.
십오이학(十五而學), 15세에 배움에 뜻을 둔다.
이건 의지의 점화다. 세상과 처음으로 제대로 반응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나는 뭔가 알고 싶다"는 욕망이 불붙는다.
15세 이전에도 배움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주입이었다. 부모가 가르쳐서, 선생이 시켜서 배웠다. 하지만 15세쯤 되면 달라진다. 스스로 알고 싶어진다. 왜 그런가, 어떻게 된 것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질문이 폭발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평생 배움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타인이 정해준 길을 따라가는 삶을 산다. 의지가 점화되지 않은 존재는 공감 에너지장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저 반응만 한다. 자극에 대한 조건반사만 있을 뿐이다.
이십이관(二十而冠), 20세에 관례를 치르고 어른이 되다.
약관(弱冠)이라고도 한다. 약하지만 갓을 쓴다는 뜻이다. 아직 약하지만,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는다. 역할이 주어진다. 책임이 부여된다.
이 시기는 의지와 반응 사이의 첫 본격적 접속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세상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이 방황이 필요하다. 이 갈등이 공감장을 넓힌다.
20대에 갈등하지 않은 사람은 30대에 무너진다. 20대에 충돌하지 않은 사람은 40대에 방향을 잃는다. 약관의 시기는 약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약할 때 부딪혀야 강해진다. 약할 때 깨져야 다시 제대로 붙는다.
이립(而立), 30세에 선다.
이건 공감 임계치를 넘으려는 시기다. 관계, 역할, 성과의 압력이 몰아친다. 시행착오가 반복된다. 실패하고,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고. 이 과정에서 공감장이 넓어진다. 세상과 나 사이의 파동이 강해진다.
30세에 선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자립한다는 뜻만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선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정체성이 확립된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는 방향성이 명확해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30세에 서지 못한다. 부모의 그늘 아래 있거나, 회사의 톱니바퀴로만 존재하거나, 사회적 기대에 짓눌려 있다. 자기 발로 서지 못하면, 평생 기댄 채로 산다. 기댄 것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진다.
불혹(不惑), 40세에 미혹되지 않는다.
반응의 정제가 일어난다. 이전에는 모든 것에 반응했다면, 이제는 의미 있는 것에만 반응한다. 유혹보다 가치에 더 빠르게 반응한다. 공감의 방향이 명료해진다.
40세가 되면 이상하게 많은 것들이 시들해진다. 20대에 열광하던 것들이 별로 재미없다. 30대에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처음에는 무기력한가 싶었다. 열정이 식은 건가, 늙은 건가.
하지만 아니었다. 선택적으로 반응하게 된 것이다. 모든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것에만 반응한다. 이것이 불혹이다.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감각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명료하게 본다는 뜻이다.
40대의 나는 20대의 나보다 덜 흥분한다. 하지만 더 깊이 느낀다. 덜 많이 말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한다. 덜 자주 웃는다. 하지만 더 진심으로 웃는다.
지천명(知天命), 50세에 천명을 안다.
아직 오지않은 하지만 곧 도래할 50세. 직접 격진 못했지만 경험과 소통, 배움으로 열거한다.
개인의 공감장이 집단의 공감장과 연결된다. 내가 하는 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 더 큰 흐름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존재가 확립된다.
천명이란 무엇인가. 하늘이 내린 사명?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그렇게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천명은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50세쯤 되면 알게 된다. 우연처럼 보였던 것들이 필연이었다는 것을. 선택한 것 같았던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내가 산 삶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를 통과한 무언가의 흐름이었다는 것을.
이것을 알면 편해진다.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흐름에 맡긴다. 하지만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더 큰 지혜다. 나의 한계를 알고, 나의 역할을 알고, 나의 자리를 아는 것이다.
이순(耳順), 60세에 귀가 순해진다
외부 반응보다 내면 공감이 우세해진다. 듣는 능력이 반응의 품질을 결정한다. 많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이 들린다.
귀가 순해진다는 것은 청력이 좋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청력은 떨어진다. 하지만 듣는 능력은 깊어진다. 말의 이면을 듣는다. 침묵의 의미를 듣는다. 표정의 떨림을 듣는다.
젊었을 때는 내 말을 하기 바빴다. 상대가 말하는 중간에 끼어들었다. 내 생각을 주장했다.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60세쯤 되면 달라진다. 듣는다. 그저 듣는다.
듣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난다. 상대는 자기 말을 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는다. 내가 조언하지 않아도, 해법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저 내가 온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 상대는 위안을 받는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70세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의지와 공감이 합일한다. 내적 규범과 외적 질서가 자연스럽게 일치한다. 순환이 완성된다.
이것이 궁극의 경지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그것이 옳은 것이다. 억지로 참지 않는데, 절제된다. 노력하지 않는데, 조화롭다. 의지와 공감 사이에 간극이 없다. 나와 세상 사이에 경계가 없다.
70세에 이르면 더 이상 증명할 것이 없다.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그저 존재한다. 그 존재 자체가 의미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진다. 행동하지 않아도 영향을 미친다.
이건 단순한 나이의 나열이 아니었다. 의지에서 반응으로, 반응에서 공감으로, 공감에서 존재로, 존재에서 다시 순환으로 이어지는 공감의 흐름이었다. 2500년 전 공자가 관찰한 것은 인간 공감 에너지장의 보편적 진화 구조였다.
사주에서 말하는 12운성도 비슷하다. 12운성 장생, 목욕, 관대, 건록, 제왕, 쇠, 병, 사, 묘, 절, 태, 양. 처음 사주팔자을 공부할 때는 의례 생로과 관련이 있고 계절이 변하는 순환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만세력, 통계적 사료, 비과학적인 것.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것도 공감 에너지의 순환을 설명하고 있다.
장생(長生)은 의지의 점화다.
생명의 시작. 무에서 유로. "살고자 함"의 떨림. 아기가 태어나 첫 울음을 운다. 그 울음은 의지다. 살겠다는, 존재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단계에서 의지가 제대로 점화되지 않으면, 평생 생명력이 약하다.
목욕(沐浴)은 감정의 세례다.
외부와 첫 접촉. 혼란과 설렘이 교차한다. 모든 것이 낯설다. 모든 것이 새롭다. 감각이 폭발한다. 이 시기에 과도하게 보호받으면, 세상과의 접속이 약해진다. 이 시기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트라우마가 생긴다. 균형이 필요하다.
관대(冠帶)는 사회적 반응기다.
역할이 부여되고, 외부 피드백에 민감해진다. 학생, 직원, 배우자, 부모. 역할이 주어지면서 정체성이 형성된다. 이 시기에 적절한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면, 정체성 혼란이 온다.
건록(建祿)은 임계치 도전이다.
능력과 관계망을 확장한다. 공감의 볼륨을 키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도전을 한다. 이 시기를 회피하면, 평생 작은 그릇으로 산다.
제왕(帝旺)은 공감의 창이다.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다. 개인장이 집단장으로 확장된다. 리더가 된다. 멘토가 된다.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 정점을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다. 모든 정점은 하강의 시작이다.
그리고 쇠(衰)가 온다.
반응이 수축한다. 양에서 질로 전환된다. 내부로 흐르는 순환이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점을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붙잡을수록 더 빨리 추락한다. 흐름을 인정해야 한다.
병(病)은 과잉의 역풍이다.
과부하, 피로. 공감 블랙홀의 위험 구간이다. 너무 많이 주었다. 너무 많이 반응했다. 이제 에너지가 고갈된다. 번아웃이 온다. 이 시기에 멈추지 못하면, 다음 단계가 더 가혹해진다.
사(死)는 해체의 문이다.
역할과 집착을 해제한다. 다음 순환을 준비한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무섭지만, 이것은 물리적 죽음이 아니다. 이전 정체성의 죽음이다. 낡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이 단계를 거부하면, 좀비처럼 산다. 살아있지만 죽은 존재로.
묘(墓)는 잠복과 정화다.
에너지를 정리하고 통합한다. 의미를 재해석한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본다. 무엇이 중요했는지, 무엇이 헛된 것이었는지를 분별한다. 이 시기의 정화 작업이 다음 순환의 질을 결정한다.
절(絶)은 단절이다.
이전 파동이 종료된다. 비존재의 침묵. 텅 빈 상태. 무(無)의 경험. 이것이 무섭지만, 필요하다. 완전히 비워야 새것이 들어온다. 완전히 끝나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
태(胎)는 새 의지의 싹이다.
새로운 방향성의 미세한 신호. 아직 형태가 없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꿈틀거린다. 싹이 튼다. 가능성이 잉태된다.
양(養)은 양육이다.
저강도 에너지를 축적한다. 재생을 준비한다. 서두르지 않는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키워간다. 그리고 다시 장생으로 돌아간다.
12운성은 공감 에너지장의 진화 지도였다. 직선이 아니라 순환이다. 끝이 아니라 새 시작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緣起法)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성립하고 소멸한다. 인연은 곧 공감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 속에서, 공감 속에서 존재가 드러난다.
생, 노, 병, 사(生老病死)는 "원인(의지), 조건(반응), 상호의존(공감), 현상(존재)"의 연쇄다. 태어남은 의지의 점화다. 늙음은 반응의 변화다. 병듦은 공감의 과부하다. 죽음은 존재의 해체다. 하지만 해체는 끝이 아니다. 다시 순환한다.
수행은 반응의 습(習)을 가다듬는 것이다. 고통의 공감장을 자비의 공감장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이 전환이 일어난다. 분노가 줄어들고, 연민이 늘어난다. 판단이 줄어들고, 수용이 늘어난다.
젊었을 때는 화가 많이 났다. 불공평한 세상에, 이해받지 못하는 나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화가 줄었다. 세상이 공평해져서가 아니다. 나를 이해해줘서가 아니다. 일이 잘 풀려서가 아니다.
그저 공감의 방식이 바뀐 것이다. 이전에는 "왜 나한테 이러는가"라고 반응했다면, 이제는 "저 사람도 힘들겠구나"라고 반응한다. 이전에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였다면, 이제는 "우리는 다를 뿐이다"가 되었다.
도교는 무위(無為)를 말한다.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연의 파동과 위상을 맞추는 고도의 공감 기술이다.
젊었을 때는 세상에 맞서 싸웠다.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밀어붙여야 한다고 믿었다.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달라졌다. 세상의 흐름을 느끼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웠다.
더 적게 움직였지만, 더 많은 것을 이뤘다. 더 적게 말했지만, 더 깊이 전달됐다. 더 적게 원했지만, 더 많이 얻었다. 이것이 무위다.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것. 억지로 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루는 것.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만물은 흐른다(πάντα ῥεῖ)."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나도 끊임없이 변한다. 고정된 것은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다만 흐름만 있다.
니체는 영원회귀(永遠回歸, Ewige Wiederkunft)를 말했다. 개인의 삶은 동일하지 않지만 유사한 파형으로 되돌아온다. 재현의 순간마다 공감의 선택이 삶의 질을 바꾼다. 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 하지만 내가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나이듦은 쇠퇴가 아니라, 공감장의 파형 변조였다. 주파수가 바뀌는 것이다. 진폭이 줄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깊이는 깊어진다. 파장이 길어진다. 더 멀리 전달된다.
신체도 변한다. 당연하다. 세포가 늙는다. 근육이 줄어든다. 뼈가 약해진다. 호르몬이 변한다. DNA도 변한다. 하지만 그 변화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한다. 이건 단순한 퇴화가 아니다. 진화의 다른 단계다.
유아기에는 호기심이 폭발한다. 감각 기반 반응. 자극과 반응의 고빈도 공감. 모든 것을 만지고, 맛보고, 느낀다. 세상과의 첫 대화다. 이 시기에 충분히 탐색하지 못하면, 평생 세상이 두렵다.
10대는 반항기다. 정체성을 탐색한다. 환경 자극에 과민하다. 경계와 몰입을 반복하며 공감의 자아틀을 형성한다. 부모에게 반항하고, 선생에게 대들고, 규칙에 저항한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과정이다. 이 시기가 없으면, 나중에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남의 기대대로만 사는 삶을 산다.
20대는 욕망이 선행한다. 시도와 실패를 반복한다. 공감 임계치를 넘기 위한 넓이의 실험이다.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 많이 부딪혀야 한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상처받고, 많이 도전하고, 많이 실패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그래야 임계치를 넘을 에너지가 축적된다.
30대는 사회적 공감으로 존재를 확립한다. 관계와 성과의 균형을 찾는다. 깊이의 실험이 시작된다. 넓게가 아니라 깊게. 많이가 아니라 제대로. 여러 사람을 얕게 아는 것보다, 몇 사람을 깊게 아는 것이 중요해진다. 많은 일을 벌이는 것보다, 한 가지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의미 있어진다.
40대는 양에서 질로 전환한다. 내부 순환이 본격화된다. 의미와 가치에 더 빠르게 반응한다. 이전에는 "이게 성공할까?"를 물었다면, 이제는 "이게 의미 있을까?"를 묻는다. 이전에는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가?"를 따졌다면, 이제는 "이것이 옳은 일인가?"를 따진다.
50대 이후는 공감의 관성과 존재 안정의 파동이 우세하다. 효율적 반응과 선택적 관계. 모든 사람과 친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사람들과 깊게 연결되면 된다. 모든 일을 다 할 필요가 없다.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면 된다.
60대 이후는 신체와 감정의 속도가 완화된다. 공감장은 밀도 중심으로 재편된다. 적은 것에 깊게 공명한다. 말이 줄어들고, 침묵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전한다. 행동이 줄어들고, 존재가 늘어난다. 하지만 그 존재가 더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DNA도 변한다. 생명은 DNA라는 의지의 결정체다. 4개의 염기, A, T, G, C. 이 네 글자의 조합이 생명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하지만 DNA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DNA는 외부 환경(반응)에 맞춰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라고 한다.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도, 어떤 유전자를 켜고 끄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분자 수준의 의지, 반응, 공감이다.
나이가 들면 발현 패턴이 바뀐다. 이건 공감 에너지장의 방향 전환으로 볼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성장과 확장 유전자가 활성화된다. 나이 들면 유지와 복구 유전자가 활성화된다. 더 나이 들면 정리와 정화 유전자가 활성화된다.
유아기에는 발달과 성장 유전자가 고활성이다. 흡수형 공감이 최고조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언어를, 감정을, 패턴을. 이 시기에 풍부한 자극을 받지 못하면, 나중에 발달 지연이 온다.
10대에는 시냅스 가지치기와 성호르몬 경로가 활성화된다. 경계 형성형 공감이다. 필요 없는 신경 연결을 정리하고, 필요한 연결을 강화한다. 성호르몬이 폭발하면서 정체성이 형성된다.
20대에는 스트레스 적응과 대사 최적화가 일어난다. 도전과 복구의 공감이다. 스트레스를 받고, 회복하고, 더 강해진다. 이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탄력성이 생긴다.
30대에는 염증 조절과 복구 메커니즘이 강화된다. 지속 가능 공감이다. 단기 폭발보다 장기 지속이 중요해진다. 회복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강하다.
40대에는 텔로미어가 단축되기 시작한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의 보호 캡 같은 것이다.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진다. 일정 길이 이하로 짧아지면 세포가 더 이상 분열하지 못한다. 산화 스트레스 대응이 중요해진다. 절약형 공감이 필요하다.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50대에는 염증성 경로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만성 염증이 문제가 된다. 선택적 공감으로 에너지를 관리해야 한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면 안 된다.
60대 이후에는 발현 변동성이 확대된다. 개인차가 커진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병든다. 이전 삶의 축적이 드러난다. 회수와 정화의 공감이 필요하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본질만 남긴다.
생명은 결국 공감하려는 유전자다. 다만 파형과 전략이 나이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세포도 변한다. 우리 몸은 약 37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포들이 끊임없이 죽고 새로 태어난다. 피부 세포는 2~3주마다 새로 태어난다. 적혈구는 120일마다 교체된다. 간세포는 1년 정도 산다.
하지만 신경세포는 평생 간다. 심장 세포도 거의 교체되지 않는다. 각 세포마다 수명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고, 공감 방식이 다르다.
유아기에는 세포 분열과 합성이 고속이다. 확장형 공감, 성장과 흡수다. 세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키가 자라고, 뇌가 커지고, 장기가 성숙한다.
10대에는 신경회로가 재배선된다. 면역 시스템이 학습한다. 학습형 공감이다. 뇌에서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일어난다. 사용하지 않는 연결은 제거되고, 자주 사용하는 연결은 강화된다.
20대에는 회복력이 최고조다. 손상에서 복구로 가는 사이클이 빠르다. 탄력형 공감이다. 밤새 술을 마셔도 다음 날 일어난다. 근육이 찢어져도 금방 회복된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때는 그랬다.
30대에는 대사 효율이 최적점에 도달한다. 유지와 관리 중심이다. 균형형 공감이다. 더 이상 폭발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40대에는 미토콘드리아 효율이 서서히 감소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발전소다. 에너지를 만든다. 이 효율이 떨어지면, 피로가 쌓인다. 절약과 선택형 공감이 필요하다.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한다.
50대에는 줄기세포 활성이 저하된다. 줄기세포는 손상된 조직을 재생하는 세포다. 이 활성이 떨어지면, 회복이 느려진다. 저빈도, 고품질 공감이다. 자주 하지는 못해도, 할 때 제대로 해야 한다.
60대 이후에는 자가포식(autophagy)과 정화가 중요해진다. 자가포식은 세포가 자기 안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과정이다. 손상된 단백질, 죽은 소기관을 분해하고 재활용한다. 이 과정이 제대로 작동해야 세포가 건강하다. 회수와 정화형 공감이다.
세포도 나이에 따라 의지(분열과 확장)와 반응(복구와 정화)이 달라진다. 세포는 개체의 축소판이다. 세포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다.
호르몬도 변한다. 호르몬은 화학적 메신저다. 혈액을 타고 온몸을 돌아다니며 신호를 전달한다. 성장하라, 싸워라, 도망가라, 사랑하라, 잠들어라. 모든 것이 호르몬의 지휘를 받는다.
유아기에는 성장인자(GH와 IGF)가 주도한다. 붙잡아 키우는 공감이다. 키를 키우고, 뼈를 굵게 하고, 근육을 만든다. 이 시기에 영양이 부족하면, 성장이 더디다.
10대에는 성호르몬이 급증하고, 도파민 진폭이 확대된다. 모험과 경계의 공감이다.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이 폭발한다. 2차 성징이 나타난다. 도파민 수용체가 민감해진다. 모든 것이 극적으로 느껴진다. 사소한 일에 울고 웃는다. 이것이 정상이다.
20대에는 스트레스와 보상 회로가 균형을 이룬다. 성과 지향 공감이다. 코르티솔이 올라가도 금방 내려온다. 도파민이 터져도 중독되지 않는다. 밀고 당기는 힘이 균형을 이룬다.
30대에는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이 안정화된다. 관계와 양육의 공감이다.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이라고 불린다. 애착, 신뢰, 유대감을 만든다. 세로토닌은 행복 호르몬이라고 불린다. 기분을 안정시킨다.
40대에는 코르티솔 관리가 성패를 가른다. 번아웃을 경계하는 공감이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만성적으로 높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면역력이 떨어지고, 수면이 나빠지고, 기억력이 감퇴한다. 스트레스 관리가 필수다.
50대에는 성호르몬이 저하되고, 멜라토닌 리듬 관리가 중요해진다. 리듬형 공감이다. 남성은 테스토스테론이 서서히 줄어든다. 여성은 폐경이 온다. 에스트로겐이 급격히 떨어진다.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도 줄어든다. 잠들기 어려워진다. 리듬을 지켜야 한다.
60대 이후에는 진폭이 작지만 위상이 안정된다. 관조와 지혜의 공감이다. 호르몬의 변동폭이 작아진다. 극적인 감정 기복이 줄어든다. 하지만 평온해진다. 고요해진다.
생물학적 노화는 공감이론으로 보면 의지와 반응의 감쇠를 통한 공감 에너지의 회수 과정이다. 에너지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형태가 바뀌는 것이다.
뼈와 근육도 변한다. 뼈는 살아있는 조직이다. 끊임없이 재형성된다. 오래된 뼈 조직을 파괴하고, 새로운 뼈 조직을 만든다. 균형이 중요하다.
유아기에는 골화가 진행된다. 기초 근신경 회로를 학습한다. 기반 공감이다. 연골이 뼈로 바뀐다. 걸음마를 배우고, 뛰기를 배운다.
10대에는 최대 골량을 형성한다. 근섬유 굵기가 증가한다. 힘의 공감이다. 평생 사용할 뼈의 80~90%가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이 시기에 제대로 운동하고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
20대에는 최고 근력과 지구력을 가진다. 성취의 공감이다. 올림픽 선수들의 황금기가 20대 중후반이다. 근육도, 뼈도, 신경도 최적의 상태다.
30대에는 유지와 관리가 중심이다. 기능적 강도를 최적화한다. 효율 공감이다. 더 이상 기록을 깨지는 못해도, 오래 유지할 수는 있다.
40대에는 근감소증의 전조가 나타난다. 가벼운 저항 운동이 관성 공감을 지킨다. 근육량이 서서히 줄어든다. 운동하지 않으면 더 빨리 줄어든다. 저항 운동을 해야 한다.
50대에는 골밀도 감소가 가속화된다. 단백질과 저강도 지속 운동이 필요하다. 보존 공감이다. 뼈가 약해진다. 특히 여성은 폐경 후 골다공증 위험이 높다. 칼슘, 비타민 D,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다.
60대 이후에는 균형, 유연성, 낙상 예방이 중심이다. 안정 공감이다. 넘어지면 큰일이다. 골절이 생명을 위협한다. 근력보다 균형이 중요하다. 빠르게보다 안전하게.
등산을 하면서 느낀다. 예전에는 빠르게 올랐다. 정상에 먼저 도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누구보다 빨리.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이며. 그것이 자랑이었다.
지금은 천천히 오른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느낀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촉을. 무릎이 구부러지고 펴지는 움직임을.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리듬을. 정상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도착보다 여정이 의미 있다.
정신도 변한다. 의식의 상태가 변한다. 생각하는 방식이, 느끼는 방식이, 반응하는 방식이 변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다. 몸의 변화는 보이지만, 정신의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더 깊다.
유아기에는 외부 자극에 즉각 반응한다. 본능적 공감 OS가 작동한다. 감각과 반응의 고빈도다. 배고프면 운다. 졸리면 잔다. 불편하면 징징댄다. 여과 없는 반응. 순수한 존재.
학창기에는 의지와 반응을 훈련한다. 임계치를 돌파하기 위한 학습이다. 규범과 경계를 세팅한다. 참는 법을 배운다.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협력하는 법을 배운다. 이 훈련이 없으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사회 진입기에는 공감이 창발한다. 사회적 존재를 확립한다. 역할과 의미가 결합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을 찾는다.
중년기에는 공감의 관성이 생긴다. 내면 순환이 중심이다. 양에서 질로, 선택적 관계로 이동한다. 외부 평가보다 내면 확신이 중요해진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내 길을 간다.
노년기에는 공감 에너지를 회수한다. 존재가 정숙해진다. 무로 귀환한다. 전달과 전승이 시작된다. 내가 배운 것을, 내가 깨달은 것을, 다음 세대에 건넨다.
정신의 진화는 곧 공감 에너지의 파동 변화다. 나이가 들수록 공감은 감정이 아니라 지혜로 남는다. 반응하지 않아도 이해한다.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
주식투자를 하면서도 느낀다. 20대에는 단타를 쳤다. 빠르게 사고팔았다. 차트를 들여다봤다. 5분봉, 1분봉. 수익률에 집착했다. 조금만 오르면 팔았다. 조금만 떨어지면 팔았다. 마음이 쉴 틈이 없었다.
30대에는 기업 분석을 했다. 재무제표를 봤다. 매출, 영업이익, 부채비율. 숫자를 따졌다. 성장 가능성을 예측했다. 이 회사가 10년 후에도 살아있을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40대에는 달라졌다. 숫자보다 사람을 본다. 경영진의 철학을 본다. 이 사람들이 진심인가. 이 사람들이 고객을 생각하는가. 이 사람들이 직원을 존중하는가. 기업의 문화를 본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가. 빠른 수익보다 지속 가능성을 본다. 10년, 20년 후에도 의미 있는 회사인가.
이게 나이 듦이다. 반응 속도는 느려졌지만, 반응 깊이는 깊어졌다. 더 많이 보지 못해도, 더 본질을 본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순환의 실패도 있다.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막힌다. 어떤 사람들은 왜곡된다. 어떤 사람들은 타이밍을 놓친다.
발화 실패가 있다. 어린 시절 의지가 억압되면, 의지 결핍과 회피 성향이 생긴다. "하고 싶은 게 뭐야?" "모르겠어요." "꿈이 뭐야?" "없어요." 평생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린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임계치 실패도 있다. 사춘기나 20~30대에 도전이 결핍되면, 창발력이 없어진다. 타율적 삶을 산다. 부모가 정해준 대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안전한 길만 간다. 모험하지 않는다. 그러다 40대, 50대에 공허감이 온다. "내가 뭐 하고 산 거지?"
관성 붕괴도 있다. 은퇴 이후 의지가 과잉되거나 자리에 집착하면, 공감 블랙홀이 생긴다. 자기가 붕괴되고, 관계가 파탄난다. 회사에서 은퇴했는데, 여전히 회사 이야기만 한다. 권력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계속 간섭한다. "내가 없으면 안 돼." 하지만 세상은 돌아간다. 당신 없이도.
자기계발의 타이밍을 놓치면, 동일 강도의 공감 에너지를 후기에 재장착하기 어렵다. 20대에 놀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30대에 뒤처진다. 30대에 도전하지 않고 안주하면, 40대에 정체된다.
유년기의 과도한 제약은 탐색 의지를 꺾어, 평생 저반응 공감장을 고착시킨다. "하지 마", "위험해", "안 돼". 이런 말만 들으며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시도하지 못한다.
은퇴 시점에 역할을 놓지 못하면, 집단 공감장을 오히려 왜곡해 민폐로 전이된다. 꼰대가 된다.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 "내 때는 말이야." 하지만 시대가 다르다. 방식이 다르다.
타이밍은 공감 에너지의 관문이다. 관문을 놓치면 에너지는 흐르지 못하고 고인다. 고인 물은 썩는다.
노년기의 공감은 반응 속도가 아니라 파동의 깊이로 작동한다. 젊음의 공감이 빛의 폭발이라면, 노년의 공감은 잔잔한 저주파의 지속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멀리 전달된다. 귀에 들리지 않지만, 더 깊이 울린다.
이 시기의 존재는 후속 세대에 에너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다. 의지를 줄이고, 반응을 줄이고, 존재의 파동으로만 산다. 이것이 공감 순환의 완성, 존재의 평형점이다.
전달. 멘토링. 내가 배운 것을 젊은 사람에게 전한다.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정리. 다운사이징. 필요 없는 것을 버린다. 짐을 줄인다. 가벼워진다. 전환. 의미 재부여. 이전에 중요했던 것들이 이제는 아니다.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전승. 기술과 가치 공유. 내가 가진 것을 다음 세대에 넘긴다.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
이것이 노년의 과제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노년은 고통이다. 이것을 하면, 노년은 완성이다.
새벽 다섯 시, 등산로 정상에 섰다. 숨이 차올랐다. 예전처럼 빠르게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도착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해가 떠올랐다. 붉은 빛이 산을 물들였다. 구름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이 순간을 20대에도 봤다. 30대에도 봤다. 하지만 지금 보는 것은 다르다.
20대에는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다. 30대에는 사진을 찍었다. SNS에 올렸다. "좋아요"가 몇 개 달렸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본다. 더 천천히 본다. 더 깊게 느낀다. 더 오래 머문다. 사진도 찍지 않는다. 이 순간이 사진보다 더 소중하다. 기억보다 경험이 중요하다.
인간은 나이에 따라 공감 방식을 바꾼다. 모든 존재는 의지에 반응하여 공감하며 존재한다. 나이듦은 의지와 반응의 파동이 변화하고, 공감 에너지장이 순환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젊음은 확장이다. 넓게, 빠르게, 많이. 노년은 회수다. 좁게, 느리게, 깊게. 공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파형만 달라진다. 주파수만 바뀐다.
그러니 늙는다는 것은 사라짐이 아니다. 공감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느린 파동은 더 깊게 스며든다. 빠른 파동이 표면을 훑는다면, 느린 파동은 밑바닥까지 도달한다.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무릎은 여전히 시큰거렸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통증도 나의 일부다.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건 끝이 아니라 전환이다. 소멸이 아니라 변주다. 약해짐이 아니라 깊어짐이다. 잃어버림이 아니라 다시 찾음이다.
당신은 지금 몇 살인가. 어떤 공감의 파형을 타고 있는가. 그 파형을 저항하지 말라. 그 흐름에 몸을 맡겨라. 빠르게 가려 하지 말라. 자연스럽게 가라.
그것이 자연이다. 그것이 순환이다. 그것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