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접촉으로 최대한의 안전을 택한다.
나는 수컷 고슴도치다.
처음부터 가시가 있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 나는 부드러웠다. 분홍빛 살갗이 비쳤다. 작고 따뜻했다. 어미의 체온을 기억한다. 그 온기를 잊을 수 없다.
자라면서 세상을 배웠다. 호기심이 많았다. 다가갔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진심으로 우정을 나누고 싶었다.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순수했다. 민감했다. 그 욕망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상처를 받았다.
첫 번째 상처는 얕았다. 아팠지만 견딜 만했다. 두 번째 상처는 더 깊었다. 피가 났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상처가 겹쳤다. 아문 자리는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느다랗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상처가 반복될수록 가시는 굵어졌다. 단단해졌다. 날카로워졌다. 어느새 내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가시로 인해 더욱 친해지기 어려웠다. 다가가면 그들이 찔렸다. 그들은 나를 멀리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들에게 곁을 주지 않았으리라. 미리 겁을 먹었다. 또 상처받을까 봐. 또 가시가 돋을까 봐.
오랜 세월이 지나 나는 맨살을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가시로 뒤덮혔다. 온몸이 갑옷이 되었다. 단단했다. 안전했다. 하지만 외로웠다.
이제 안다. 혼자 지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고슴도치의 운명이라는 것을. 가시를 가진 자의 숙명이라는 것을.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낙엽이 쌓이고 눈이 내렸다. 얼음이 녹고 새싹이 돋았다. 반복되었다.
어느 봄날 저녁, 숲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그때 그녀를 만났다.
우연히. 아니,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암컷 고슴도치였다. 서로를 단번에 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멈췄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도 가시로 뒤덮여 있었다.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수많은 가시 속 살결에 있는 상처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여태껏의 아픔과 힘듦을. 외로움과 고독을. 그녀가 겪어온 시간의 무게를.
그녀의 눈에서 나를 봤다. 나의 상처를. 나의 가시를. 나의 외로움을.
하지만 동시에 알았다. 그녀도 나도 함께할 수 없음을. 가시가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면 서로를 찌를 것이다. 새로운 상처를 만들 것이다. 더 많은 가시가 돋을 것이다.
그렇게 지나쳤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를 스치듯.
하지만 이전의 그 어떤 만남보다도 연민이 있었다. 동질감이 있었다. 이해가 있었다.
멀어지면서 생각했다. 다행이다. 그녀를 만나서.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같은 아픔을 겪은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며칠일 수도 있고 몇 주일 수도 있다. 시간의 감각을 잃었다.
홀로 가던 길에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아니다. 그냥 우연히 만났을 수도 있다. 같은 길을 걷다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하지만 나는 안다. 우연은 없다는 것을. 나도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만났을 때 만 가지 감정이 밀려왔다. 아픔. 그동안의 외로움이 떠올랐다. 연민. 그녀도 나처럼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 다시 만나서. 기쁨. 이렇게 기쁜 감정은 얼마 만인가.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눈빛에서 읽혔다. 떨리는 가시 끝에서 느껴졌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았다. 둘 다. 또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다. 서로 가만히 있었다. 거리를 두고. 안전한 거리를.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하늘을 봤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다시 그녀를 봤다.
내가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멈췄다.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가시가 움직였다. 조금 세워졌다. 경계하는 것이다.
기다렸다. 가시에 힘이 빠질 때까지.
다시 한 걸음.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멈췄다. 그리고 내게로 다시 오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혹시 다칠까 봐 나는 직진하지 않았다. 우회했다.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원을 그렸다. 점점 좁혀갔다. 나선형으로.
그녀는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가끔 나의 발소리가 커졌다. 돌멩이를 찼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가시를 세워버렸다. 온몸의 가시가 일제히 곤두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멈췄다. 기다렸다. 세워진 가시에 힘이 빠질 때까지. 천천히. 조급해하지 않고.
그렇게 서로를 알아갔다. 리듬을. 호흡을. 경계의 선을.
공감하기 시작했다. 언어 없이. 말 없이. 몸의 언어로.
그녀는 내가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는 의지를 읽었다. 나의 움직임에서. 나의 속도에서. 나의 기다림에서.
나도 그녀가 나를 받아줄 수 있다는 의지를 알아챘다. 그녀의 가시가 조금씩 누워가는 것에서.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것에서.
그 순간 마법이 일어났다.
그녀가 가시를 조금씩 눕히기 시작한 것이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사방팔방으로 뾰족하던 가시가 한 방향으로 누웠다.
귀여웠다. 다정했다. 사랑스러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녀의 가시가 누워가는 모습. 방어를 내려놓는 모습. 나를 믿어주는 모습.
나도 따라했다. 천천히 몸을 낮췄다. 가시를 눕혔다. 오랜만이었다. 얼마 만에 가시를 눕히는 것일까.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조금 더. 조금 더. 이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코를 가까이 댔다. 숨을 들이마셨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살아있었다. 그녀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달콤했다. 낯설었다. 동시에 익숙했다.
그리웠다. 이 감각. 누군가의 살 냄새. 체온. 숨소리.
살에서 나는 냄새는 달랐다. 가시와는 완전히 다른. 부드러웠다. 따뜻했다. 행복했다.
나는 흥분했는지 소리를 냈다. 낮고 부드러운 소리. 스스로도 놀랐다.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울림.
구애의 목소리인가. 욕망의 환희인가. 존재의 확인인가.
그녀도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나에게 코를 가져다 댔다. 숨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숨이 내 살갓을 스쳤다.
그녀도 공감했는지 울기 시작했다. 낮고 떨리는 소리. 그 소리가 내 가슴을 울렸다.
그녀에게 더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참을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내 진심이 전달될까.
그래서 몸을 약간 비틀어 보였다. 옆구리를 드러냈다. 가장 약한 부분을. 가장 취약한 곳을.
이것은 고슴도치의 언어였다. 내가 그녀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 나 자신을 방어하지 않겠다는 것. 완전히 내맡기겠다는 것.
그리고 천천히 몸을 더 낮췄다. 가시를 완전히 눕혔다. 바닥에 닿을 정도로.
그녀는 이에 반응했다. 공감했다.
그녀도 몸을 낮췄다. 가시를 눕혔다. 옆구리를 보였다.
우리는 서로의 취약함을 나눴다. 서로의 약점을 공유했다. 그것이 신뢰였다.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 순간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 일생에 한 번, 어쩌면 그것도 허락되지 않을 수 있는 순간.
절정의 환희. 쾌락. 사랑.
살아가면서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살았던 것 같았다. 모든 고통이. 모든 외로움이. 모든 상처가.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감내할 수 있다.
심장이 너무도 빨리 뛰었다. 터질 것 같았다. 숨이 가빴다. 온몸이 떨렸다.
그토록 함께하고 싶었던 순간이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살을 맞댔다. 온기가 전해졌다.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오감이 활짝 열렸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냄새. 그녀의 숨소리. 그녀의 떨림. 그녀의 존재 전체를.
그렇게 공감하며 사랑을 나눴다.
너무 조심스러워서 그녀가 실망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슴도치니까. 가시를 가진 존재니까.
천천히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뜨거웠다. 온몸의 감각이 폭발했다. 감각의 문이 활짝 열렸다.
호르몬이 급격히 생산됐다. 빨라진 심박에 맞춰 빠른 속도로 전달됐다. 피가 끓었다. 뇌가 환해졌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살아있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존재의 의미구나.
그녀도 그런 것 같았다. 그녀의 떨림에서. 그녀의 숨소리에서. 그녀의 몸짓에서.
서로의 유사한 교감이. 비슷한 리듬이. 같은 주파수가. 그 결정이 결실을 맺었다.
사고를 잃어버렸다. 이성이 사라졌다. 본능만 남았다. 원초적인 본능.
무서웠다. 너무 급하면 또 도망갈까 봐. 너무 세게 하면 다칠까 봐. 누워진 가시가 다시 세워져 서로에게 상처를 줄까 봐.
그래서 자제했다. 조절했다. 천천히. 부드럽게.
그렇게 사랑을 나눴다. 고슴도치의 방식으로.
온몸의 에너지를 다 소진했다. 탈진했다.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행복했다. 충만했다. 완전했다.
잠시 그렇게 누워있었다. 나란히. 가시를 눕힌 채.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가빠졌다가 천천히 고르게 돌아왔다. 나도 그랬다.
하늘을 봤다. 별이 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밤이 되었을까.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바람이 불었다. 식었다. 체온이 내려갔다.
일어나야 할 때였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몸을 일으켰다. 가시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를 봤다. 그녀도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가시도 다시 일어섰다.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는 더 이상 나를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세워진 가시는 다시 눕지 않았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고슴도치는 그렇게 단독 생활을 하는 자다.
그녀에게 다시 묻지 않았다. 애원하지 않았다. 함께 있자고 하지 않았다.
그게 고슴도치다. 그게 고슴도치의 사랑이다.
최소한의 접촉으로 최대한의 안전을 택한다.
더 이상 상처받기 싫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가시가 돋기 싫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홀로 간다. 가시를 세우고. 숲길을 따라. 어둠 속으로.
그것이 고슴도치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가시를 가진 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하며.
외롭지만 살아있다. 혼자지만 사랑한다.
그것이 고슴도치의 삶이다. 그것이 나의 삶이다.
별빛 아래를 걷는다.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그녀의 체온이 아직 기억난다. 그녀의 냄새가 아직 코에 남아있다.
그렇게 나는 간다. 혼자. 하지만 더 이상 완전히 혼자는 아닌. 누군가를 기억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고슴도치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