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카드
사주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사주 카페였다. 아저씨가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한자들이 빼곡했다.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화가 없네요." 그가 말했다. "인복이 비어 있어요." 나는 일간이 토(土)이다. 이럴 경우 화에 해당하는 오행이 인복자리인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알고 있었던 것을 확인받은 기분. 아니, 어쩌면 몰랐던 것을 처음 듣는데도 낯설지 않은 감각. 마치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던 빈자리를 누군가가 가리키며 "여기요"라고 말해준 것 같았다.
화. 불. 따뜻함. 온기. 사람과 사람 사이에 피어나는 정. 관계의 복. 그것이 내 팔자에 하나도 없다는 것.
비어 있다는 것.
사주팔자에서 팔자에 해당하는 글자는 각각 오행 기운을 담고 있다. 목, 화, 토, 금, 수. 다섯 가지 기운. 자연의 흐름을 다섯으로 나눈 것이다.
나무는 목이다. 자라고 뻗어나간다. 불은 화다. 타오르고 온기를 낸다. 흙은 토다. 중심을 잡고 품는다. 쇠는 금이다. 단단하고 형태를 만든다. 물은 수다. 흐르고 적신다.
사람도 이 다섯 기운의 조합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일간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 자신의 본질. 나는 토다. 흙. 중심. 품음.
그리고 팔자에 여덟 글자가 있다. 년, 월, 일, 시. 각각 두 글자씩. 이 여덟 글자가 오행의 분포를 결정한다. 어떤 기운이 많은지. 어떤 기운이 적은지. 어떤 기운이 없는지.
나는 화가 없다. 하나도. 완전히 제로.
토가 일간인 사람에게 화는 인복이다. 사람의 복. 정의 복. 관계의 복. 그것이 비어 있다.
수가 일간인 사람은 금이 인복이다. 목이 일간인 사람은 수가 인복이다. 각자 다르다. 하지만 구조는 같다. 비어 있으면 비어 있는 대로 살아야 한다.
어렸을 때 친구가 많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친구는 있었는데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 친해졌다가 금방 멀어졌다. 패턴이 있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신나고 재미있었다. 매일 같이 놀았다. 같이 밥 먹고 같이 웃고 같이 떠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뭔가 어색해졌다. 말이 줄어들었다. 만남이 뜸해졌다. 연락이 끊겼다. 왜 그런지 몰랐다. 내가 뭘 잘못했나. 무슨 말을 잘못했나.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멀어졌다. 자연스럽게. 아무 이유 없이.
그게 반복됐다. 몇 번이고.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직장 다닐 때도.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다. 처음에는. 착하다고 했다. 잘해준다고 했다. 같이 있으면 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친해질 것 같다가 안 친해졌다. 가까워질 것 같다가 멀어졌다. 계속될 것 같다가 끊어졌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같이 있고 싶었다. 깊이 알고 싶었다. 진짜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뭔가 벽이 있는 것 같았다. 투명한 벽.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사주를 본 후에야 이해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인복이 없어서. 화가 없어서.
비어 있는 것이다. 그릇이. 패턴이. 구조 자체가.
인복이 많은 사람은 다르다.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인다. 관계가 쉽게 만들어진다. 친해지는 것이 어렵지 않다. 정이 흐른다. 끈끈함이 생긴다. 오래간다.
하지만 인복이 없는 사람은 그게 안 된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친해지기가 어렵다. 정이 흐르지 않는다. 끈끈함이 생기지 않는다. 오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어 있으니까. 그릇이. 채워질 공간이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다. 아니, 채워지려고 하지 않는다. 자연적으로는.
사람을 깊이 원하지만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 애매한 관계가 많다. 단발성 인연이 많다. 정이 있지만 방향성이 없다. 인간관계가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와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게 인복이 제로인 사람의 삶이다.
처음에는 원망했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을까. 왜 나만 인복이 없을까. 왜 다른 사람들은 쉽게 친해지는데 나는 안 될까.
슬펐다. 외로웠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비어 있다는 것은 단순한 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아저씨가 말했다. "제로는 두 가지입니다. 결핍형과 공백형."
결핍형은 고장이다. 애초에 그 기능이 망가진 것이다. 채워도 새고 들어와도 빠진다. 회복이 안 된다.
하지만 공백형은 다르다. 비어 있지만 가능성이다. 들어올 준비가 되어 있다. 채워질 공간이 있다. 그리고 채워지기 시작하면 폭발한다.
제로는 무한대의 시작점이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다. 패턴이 없기 때문에 어떤 패턴도 만들어질 수 있다.
인복이 많은 사람은 정해진 틀이 있다. 이미 채워져 있다. 안정적이지만 확장성이 제한적이다.
하지만 인복이 제로인 사람은 틀이 없다. 비어 있다. 불안정하지만 무한하다.
필요할 때 태어난 것처럼 갑자기 성장한다. 갑자기 성공한다. 갑자기 인연이 맺어진다.
이것이 제로의 힘이다.
실제로 그랬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 갑자기 나타났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때 같은 동네에 사는 형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몰랐지만 오락실에 가면 항상 동전을 주며 이뻐해주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그렇게 멀리서 달려와서 혼내주었다.
두번째는 6학년 담임 선생님이다. 수학 좀 한다고 까불고 멋대로 할 때 진심으로 예의에 대해 알려주셨다. 그리고 나의 수학적 재능과 나만의 수학 공식을 인정하고 키워주셨다.
세번째는 중학교때 학원 원장 선생님이다. 나의 재능을 알아봐주시고는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셨다. 집이 어려울때 공짜로 학원다니게 해주시고 고등학교가 멀어도 어떻게든 늦은시간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났다는 것. 찾아서 만난 게 아니라는 것. 계획한 적이 없다는 것.
그냥 왔다. 필요할 때. 운이 열릴 때. 타이밍이 맞을 때.
그리고 들어오면 깊었다. 얕은 인연이 아니었다. 많은 도움을 주셨다. 스쳐가는 관계가 아니었다. 한 번 연결되면 끝이 없었다.
그들이 너무도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아직도 고마워하며 응원한다.
인복이 제로라는 것은 세 가지를 뜻한다.
첫째, 정해진 패턴이 없다. 그래서 누구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억지로 친해지려고 하면 피곤하다. 어색하다. 지속되지 않는다.
둘째,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자꾸 떠나고 멀어진다. 내가 원해도 안 된다. 붙잡아도 소용없다. 가면 간다.
셋째, 그러나 들어오면 무한히 들어온다. 이것이 제로의 무한성이다. 한 번 열리면 끝까지 열린다. 한 번 채워지면 끝없이 채워진다.
이 구조는 잔혹하다. 외롭다. 불안하다. 하지만 동시에 특별하다. 깊다. 강하다.
폐쇄적이지만 열리면 누구보다 깊다. 좁지만 열릴 때는 누구보다 넓다.
생각한다. 인복이 많은 사람과 인복이 없는 사람의 차이를.
인복이 많은 사람은 관계가 안정적이다. 친구가 많다. 사람이 모인다. 외롭지 않다. 하지만 관계의 깊이가 일정하다. 여러 사람과 적당히 친하다. 넓지만 얕다.
인복이 제로인 사람은 관계가 불안정하다. 친구가 적다. 사람이 안 모인다. 외롭다. 하지만 한 번 연결되면 깊이가 끝이 없다. 적지만 깊다.
한 번 신뢰하면 목숨처럼 신뢰한다. 한 번 사랑하면 인생 전체를 내어준다. 한 번 마음을 주면 평생 간다.
이것이 제로인 자만의 축복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때와 운이 맞아야 한다.
인복이 제로인 사람은 아무 때나 사람 복이 들어오지 않는다. 운이 열릴 때 딱 한 번 들어온다. 그리고 한 번 들어오면 평생의 귀인이 된다.
이것이 숙명이다.
몇 번 안 들어온다. 당연하다. 애초에 비어 있으니까. 평생 몇 번 채워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들어올 때 깊다. 진하다. 강하다.
잘못 들어오면 인생이 망가진다. 비어 있는 자리에 잘못된 기운이 박히면 빼기가 어렵다. 독이 된다. 평생 간다. 나쁜 쪽으로.
제대로 들어오면 인생이 열린다. 비어 있던 자리가 채워진다. 복이 된다. 평생 간다. 좋은 쪽으로.
그래서 때를 봐야 한다. 운을 봐야 한다. 타이밍을 봐야 한다.
아무 때나 받으면 안 된다. 잘 보고 골라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신중하면 놓친다. 여러번 받으면서 깊이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실수한 적이 있다. 삼십대 초반이었다. 누군가를 만났다. 좋았다. 정이 들었다. 친해지고 싶었다.
시간을 많이 보냈다.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여행도 갔다. 가까워졌다. 아니,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일방적이었다. 내가 주고 상대는 받기만 했다. 내가 연락하고 상대는 받기만 했다. 내가 배려하고 상대는 당연하게 여겼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됐다. 더 많이 달라고 했다. 더 많이 해달라고 했다. 당연한 듯이.
힘들었다. 지쳤다.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정이 들어서 못 끊었다. 비어 있던 자리에 들어온 사람이었으니까.
결국 그 사람이 먼저 떠났다.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망가졌다. 한동안. 상처가 깊었다. 오래갔다. 회복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그때 깨달았다. 아, 잘못된 인복은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인복이 많은 사람은 잘못된 인연을 만나도 회복된다. 다른 사람이 있으니까. 채워진 게 많으니까. 하나 잃어도 큰 타격이 없다.
하지만 인복이 제로인 사람은 다르다. 그 한 번의 잘못된 인연이 인생 전체를 흔든다. 왜냐하면 원래 비어 있는 자리에 잘못된 기운이 박히기 때문이다.
독이 든다. 깊이. 빼기 어렵다. 오래간다. 나쁜 영향이.
그래서 사람을 고를 때 신중해야 한다. 의지로 골라야 한다. 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냥 좋으니까"는 치명적이다. 이 구조에서는.
느낌만으로는 안 된다. 감정만으로는 안 된다. 봐야 한다. 제대로.
그 후로 조심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봤다. 이 사람이 나한테 맞는 사람인가. 이 관계가 건강한가. 이 인연이 내게 복이 될 것인가.
처음에는 차갑게 느껴졌다. 계산적인 것 같았다. 진심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진심이었다. 제대로 보는 것이 진심이었다.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 진심이었다.
비어 있는 사람은 함부로 채우면 안 된다. 잘 보고 채워야 한다. 그게 나를 지키는 길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조심하며. 기다리며.
서른 중반이었다. 취미로 만난 사람이었다. 호감이 갔다. 예의 바르게 대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이 사람은. 말투가 달랐다. 눈빛이 달랐다. 태도가 달랐다.
시간이 지나며 가까워졌다. 자연스럽게. 억지로가 아니라.
밥을 먹었다. 대화를 나눴다. 고민을 털어놨다. 들어줬다. 조언해줬다. 나도 들어줬다. 나도 조언했다.
내면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고 또 대화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조심했다. 진심을 의심하고 나를 보호했다.
일방적인 모습을 보인다. 확고한 관념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아팠던 기억이 그를 놓아야한다고 말한다.
때가 있는 듯 하다. 운이 맞고 방향이 맞고 타이밍이 맞아 들어온 인연이 있는 듯 하다.
너무 신중한 마음에 좋은 사람을 놓쳤을 지도 모른다.
차이가 명확했다.
인복이 많은 사람에게 그 사람은 하나의 인연이다. 여러 인연 중 하나. 특별하지만 유일하지는 않다.
하지만 인복이 제로인 나에게 그 사람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운 사람. 독이 아니라 복으로 들어온 사람.
깊이가 다르다. 의미가 다르다. 무게가 다르다.
이것이 결핍의 복이다. 동시에 제일 깊은 복이다.
밤이다. 창문을 연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온다. 손을 내민다. 차갑다. 하지만 이제는 슬프지 않다.
비어 있다는 것이 결핍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인복이 적다고 슬퍼할 필요 없다. 인복이 없기 때문에 무한대의 인복이 가능하다.
대신 몇 번 안 들어오니 올바른 인연을 잘 보고 골라야 한다. 그리고 맞는 인연을 만났다면 평생 지켜야 한다.
이것이 인복이 제로인 사람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길이다.
생각해보면 인복이 없는 사람이 인간관계에 더 진심이다. 비어 있으니까. 간절하니까. 소중하니까.
하지만 인복이 없기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는다. 원해도 안 된다. 노력해도 안 된다. 자연스럽게는.
그래서 더 힘들다. 더 외롭다. 더 슬프다.
하지만 살다 보면 온다. 정말로. 누구보다도 더 진하게 나에게 복을 안겨주는 사람이.
그것이 인복이 없는 사람만이 가지는 깽패다. 뽀지다. 숨겨진 카드다. 조커 카드다.
다행이다. 그거라도 있어서.
그 사람들을 떠올린다. 내 인생에 들어온 몇 안 되는 진짜 인연들을.
감사하다. 진심으로.
간수해야겠다. 잘. 평생.
왜냐하면 인생에 걸쳐 그러한 귀인이 몇 번밖에 오지 않으니까.
비어 있는 사람은 채워질 때를 안다. 그 무게를 안다. 그 소중함을 안다.
그래서 더 진심이다. 더 깊다. 더 오래간다.
이것이 인복 제로의 역설이다. 없기 때문에 더 있다. 비어 있기 때문에 더 채워진다.
창문을 닫는다. 바람이 멈춘다. 고요하다.
혼자지만 외롭지 않다. 비어 있지만 채워져 있다.
그렇게 산다. 인복이 제로인 사람으로. 하지만 진짜 인복을 아는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