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의 마사지와 뜨끈한 떡만둣국, 이것이 진짜 충전.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누리겠다며 야심 차게 다짐했건만,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에선 치앙마이에 도착한 지 꼬박 2주가 지나서야 첫 마사지 가게를 찾았다. 전 세계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님만해민의 오른 물가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내 안의 '대문자 I(내향형)' 기질이 발동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 찬 세련된 거리보다는, 조금 더 투박하고 조용한 곳으로 숨어들고 싶었다. 그래서 향한 곳이 '싼티탐'이었다. 지난번 산더미 같은 빨래를 이고 지고 찾았던 코인 세탁소가 있던 그 동네.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의 삶이 더 짙게 묻어나는, 화장기 없는 민낯 같은 그곳이 나에겐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가성비'라는 단어가 참 잘 어울렸다. 님만해민에서 기본 350밧은 줘야 받을 수 있는 타이 마사지를 이곳에선 250밧이면 충분했다. 지도 앱을 켜고 후기가 좋은 곳을 찾아 낯선 골목을 걸었다.
담당 관리사분께서 레몬을 동동 띄운 따뜻한 물에 내 발을 부드럽게 씻겨주셨다. 여행 내내 고생한 내 발이 호강하는 순간, 노곤함이 발끝에서부터 밀려왔다. 물기를 닦고 안내받은 침대로 이동해 커튼을 쳤다.
건네받은 헐렁한 마사지 복으로 갈아입으니, 마치 내 집 잠옷을 입은 듯 편안했다.
본격적인 마사지가 시작되었다. 발바닥부터 종아리, 등을 타고 올라와 두피까지. 꾹꾹 눌러주는 손길마다 뭉쳐있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풀려나갔다.
"으어어... 아~~"
소리를 뱉자마자 밀려오는 민망함에
"하하하하하하하"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한국 아저씨' 추임새가 절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낯선 타국, 조용한 마사지 가게에 울려 퍼진 걸걸한 탄성. 옆 침대에 웬 아저씨가 누워있나 싶어 돌아볼 법한 소리였다. 나의 민망한 감탄사에 관리사분은 "푸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리셨다.
워낙 찐 현지 분이라 영어로는 전혀 소통이 안 됐지만, 웃음 코드는 통했는지 우리는 그 짧은 순간 꽤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태국 마사지를 좀 받아봤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마법의 단어가 있다.
'낙낙(Nak Nak, 세게)'과 '바오바오(Bao Bao, 살살)'.
보통 말하는 본인의 성별에 맞춰 남자는 '캅', 여자는 '카'를 뒤에 붙이면 제법 정중한 요청이 완성된다. 나 역시 얕은 태국어 지식으로 무장하고, 조금이라도 압이 약하다 싶으면 바로 "낙낙 카~"를 외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날의 운이었는지, 아니면 관리사분이 내 몸의 근육들과 남몰래 대화를 나눈 건지 따로 요청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뭉친 곳은 강하게, 예민한 곳은 부드럽게. 중간중간 강도가 괜찮은지 세심하게 체크해 주시는 덕분에,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손길이 닿는 곳마다 압이 딱딱 들어맞았다.
1시간의 마사지가 끝나고 나니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3일 동안 2만 보씩 걸어도 거뜬할 것 같은, 방전된 배터리가 200% 충전된 느낌이랄까. 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미리 준비해 둔 50밧 지폐를 팁으로 건넸다.
가벼워진 몸과는 반대로 배꼽시계는 요란하게 울려댔다. 마사지 가게에서 내어준 따뜻한 차와 쿠키는 분명 몸과 마음을 달래라고 준 것일 텐데, 야속하게도 내겐 입맛을 돋우는 훌륭한 애피타이저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잠자던 식욕에 불을 지핀 꼴이랄까.
마침, 근처에 알고 있던 맛있는 한식집이 있어 지체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식당 앞에 다다르자,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 사이로 익숙하고 구수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반가운 한글 간판,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풍겨오는 고소한 참기름과 멸치 육수의 향.
"여기가 치앙마이여? 김밥천국이여?"
이곳은 원님만 근처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가 적극 추천해 준 곳이었다. 메뉴판을 펼치자마자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언니가 일러준 대로 떡만둣국과 김밥을 선택했다. 혼자 먹기엔 다소 벅찬 양이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맛보는 첫 한식인 만큼 내 위장을 믿어보기로 했다.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만둣국이 나왔다. 국물을 한 숟가락 뜨는 순간, 5년 전 치앙마이의 어느 한식당에서 느꼈던 실망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흉내만 낸 맛이 아니었다. 깊고 진한 사골 국물, 속이 꽉 찬 만두, 쫄깃한 쌀떡. 이건 '진짜'였다.
얼마나 열중했던지, 주위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바지 단추를 슬그머니 풀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리는 줄도 모르고 그릇에 코를 박은 채 국물까지 싹싹 비워냈다. 곁들인 야채김밥의 아삭한 식감마저 완벽한 조연이었다.
그 강렬한 맛을 잊지 못해 며칠 뒤 또다시 그곳을 찾았다. 이번엔 라면과 김밥, 그리고 달콤한 에너지 드링크를 주문했다. 이날도 역시 남김없이 그릇을 비워냈다. 반짝이는 빈 그릇을 보며 흐뭇해하실 사장님의 얼굴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몸의 피로는 마사지로, 마음의 허기는 모국의 한식으로 채웠던 시간. 치앙마이 한 달 살기라는 긴 여정 속에서 나는 비로소 완벽한 '쉼표'를 찍는 기분이었다.
낯선 곳을 부지런히 누비는 것도
여행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익숙한 안온함 속에
머무는 것도 여행의 일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