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님만해민에서 보낸 가장 게으르고 완벽한 하루.
현지인과 여행자 모두가 '오프런'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무삥(Moo Ping) 맛집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맛집은 미덕은 부지런함에 있다는 국룰을 되새기며 도착한 그곳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영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가게 안은 달짝지근하면서도 훈훈한 숯불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행히 혼자 온 여행자를 위한 빈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삥, 그리고 찰밥.
윤기가 흐르는 얇은 고기가 꼬치에 가지런히 꽂혀 나왔다. 한입 베어 무니,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맛이 혀끝을 감쌌다. 한국의 숯불갈비 맛을 닮았지만 조금 더 달콤하고, 조금 더 짭조름한 감칠맛. 5년 전에는 왜 이 맛을 몰랐을까. 뒤늦게 알게 된 이 맛이 야속해 나는 치앙마이에 머무는 내내 무삥 굽는 연기가 보이면 홀린 듯 지갑을 열곤 했다.
숯불갈비가 없어서 못 먹는 나에게, 단돈 몇 푼으로 즐기는 이 호사는 치앙마이로 여행 오길 참 잘했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양손 가득 포장해 가는 사람들, 바쁘게 오가는 배달 기사님들, 그리고 행복하게 꼬치를 뜯는 현지인들까지. 그들의 표정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육즙이 이방인의 긴장을 기분 좋게 녹여주었다.
배가 든든해지니, 또 다른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또 어떤 추억을 만들어볼까?'
지도 앱을 뒤적이다 님만해민 한복판에 평이 좋은 야외 수영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수영복과 래시가드를 챙겨 길을 나섰다. 지도상으로는 가까워 보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무삥의 달콤한 향이 몸에 배어서였을까. 그날따라 유독 배가 고팠던 태양은 내가 가는 곳마다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마치 프라이팬 위에 잘 익어가는 계란 프라이가 된 기분이었다. 정수리가 뜨거워질수록 발걸음은 빨라졌다. 곧 물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도착한 수영장은 기대 이상이었다. 미소가 아름다운 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들어선 그곳은 도심 속 오아시스 같았다. 음료가 포함된 이용권을 끊고 들어서자, 운동 기구와 트램펄린, 해먹, 그리고 새파란 물이 넘실대는 대형 풀장이 두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물에 뛰어들지 않았다.
한 달 살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박에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돌아다녔던 탓일까. 물 내음을 맡자마자, 그동안 억지로 눌러두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물과 가장 가까운 선베드에 짐을 풀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수영장에 와서 수영은 하지 않고 잠을 자는 사람. 누가 보면 웃을지 모르겠지만, 그날 선베드 위에서의 낮잠은 이번 여행 통틀어 가장 달콤한 단잠이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이불처럼 나를 포근하게 덮어주었고, 나는 꿈도 꾸지 않는 신생아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 시간쯤 잤을까. 기분 좋은 허기가 느껴져 2층 카페로 향했다. 바나나 한 개가 통째로 들어간다는 그 유명한 스무디를 주문했다.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입안 가득 진득한 바나나 향이 폭죽처럼 팡팡 터졌다.
'와! 이건 진짜다.'
두바이의 만수르도 부럽지 않을 맛이었다. 이 음료 한 잔과 선베드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수영장인데, 물이 어떤지 확인은 해보고 싶었다. 평소라면 주저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을 테지만, 그날따라 몸을 푹 적시기는 싫어, 풀장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다리만 살짝 담갔다.
찰랑이는 물의 감촉을 느끼며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들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수영을 즐기는데, 혼자 다리만 담그고 앉아 유유자적하고 있는 내 모습이 남들 눈엔 조금 신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나에게 그토록 집요했던 태양 대신 서늘한 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몸이 으슬으슬해질 때쯤, 나는 차가운 풀장 대신 옆에 마련된 따뜻한 노천탕으로 들어갔다.
재미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해가 지니 텅 빈 수영장과 달리, 노천탕에는 국적 불문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따뜻하니 너무 좋다'는 표정으로 같은 온기를 나누는 순간. 그 고요한 평화가 참 좋았다.
듣자 하니 밤이 깊어지면 이곳이 아른아른한 주황빛 낭만으로 물든다고 한다. 그 풍경을 보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덕분에 이곳을 다시 찾아올 기분 좋은 핑계 하나가 생겼다.
누군가는 돈 내고 수영장까지 와서 수영도 안 하고 잠만 잤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쉼 없이 눈에 담고, 치열하게 기록해야만 여행인 걸까.
낯선 도시의 바람을 이불 삼아
늘어지게 그 낮잠이,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진짜 여행'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