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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Oct 24. 2023

<작은 수집, 스몰 컬렉팅>을 읽고

- 가을에 찾아낸 아름다운 책

서점에서 <작은 수집, 스몰 컬렉팅>이라는 아주 예쁜 책을 발견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늘 이런 걸 만들고 싶었는데 조금 해보다 말고 제대로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 책으로 만든 작가가 멋지다.


책 속에 뉴욕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3시간의 대기 시간이 생겼는데 그때 여행 중 찍은 사진들을 보며 드로잉을 하며 보낸 시간이 실제 여행보다 더 좋았다는 내용이 나와 같아서 신기했다. 여행을 돌이켜 보며 그림을 그리고 집중하는 시간이 하나도 힘들지 않고 좋았다는 내용이었다.

공항에서 그린 뉴욕여행 장면 드로잉



나도 2017년 가족들과 대만 여행에서 작은 수첩에 그림을 그리고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나 일상을 적었었다. 식구들이 다 자고 있는 이른 아침에 전 날 찍은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드는 장면을 그려보고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글로 적는 순간이 기억난다.


대만의 순한 강아지 이야기, 관광지에서 서비스로 레모네이드를 주신 가게 주인분에 마음 따뜻해진 순간, 먹은 음식들에 대한 감상, 여행 중 흔히 있을 수 있는 작은 트러블과 그걸 해결한 이야기들이 지금 읽어도 너무 재밌다.

대만여행 노트

여행은 누구나 다 가는 흔한 코스였는데 그 과정을 쓰고 그림으로 남겼더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좋은 여행이 되었다. 훨씬 좋은 자연경관을 갖고 있고 명소도 많은 다른 나라에도 가 봤지만 그런 기록을 남긴 대만 여행이 나에게는 가장 좋은 여행으로 남았다. 특히 아이들과 어릴 때 다닌 패키지여행이나 아이들 물놀이를 위해 리조트 위주로 다닌 동남아 여행에선 기억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땐 아이들 위주로 쫓아다니기 바빠서 더 그랬던 거 같다.


인생도 그런 거 같다. 남들과 비슷한 경로를 걸으며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살았지만 그걸 기억해 내고 그 순간들을 수집한다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다. 전율이 일만큼 짜릿하고 멋진 일들로 촘촘히 채우진 못했지만 일상 속에서 그런 꽃 같은 순간들을 찾아내고 기록하고 기억한다면 마지막 순간에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었어. 아름다운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고 좋은 일들이 많았지’라고 미소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의 충만감은 앉아서 기다린다고 저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빛을 비춰서 모으고 기록하는 데 있는 거 같다.


“일상에서 새로운 수집품을 찾는 방법으로 심리지리학(psycogeography)의 한 전략을 소개해 볼게요. 심리지리학은 1950년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던 사상사 기 드보르가 처음 정의한 이론인데요. 개인이 도시를 개발한 주체의 의도와 통제 아래 수동적으로 도시를 살아가게 되는 권태를 극복하고 도시를 경험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도시를 탐험하는 재미있고 창의적인 전략’을 연구합니다”


“심리지리학의 다양한 활동 중 하나가 '표류(drift)'입니다. 우리에게 도시를 목적 없이 표류하듯 유희하며 거닐 것을 제안합니다. 이렇게 다니면서 나의 의식적 무의식적 반응으로 자신만의 진리를 구축할 때 우리가 도시를 재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 <작은 수집, 스몰 컬렉팅> 중에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서울의 거리들을 왜 그렇게 목적 없이 쏘다니길 좋아하는지 그 행위가 왜 그렇게 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고 좋았는지 이유를 찾은 느낌이다.


목적 없이 배회하다 마주치는 건물, 집, 꽃 한 송이, 나무, 새 한 마리, 문, 창문의 모양, 가게들,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이 유명한 관광지와 명소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을 보는 기쁨 못지않게 크다. 오히려 더 크다. 유명 관광지와 문화유산들은 이미 너무 많은 정보와 사람들의 감상들이 내 안에 들어있어 지금 느끼는 것이 나만의 감상인지 의아할 때가 많고 식상한 느낌마저 든다. 아직까지 실물을 대했을 때 더 큰 감동을 느낀 적이 없다. 피라미드와 콜로세움을 아직 못 봐서 그럴까?


여행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롭게 하기 라는데 그런 명소는 이미 새롭지가 않다. 평생 동안 책이나 영상으로 수백 번을 봐서 이미 본 것 같은 느낌이다. 막상 가보면 '아 이곳에 내가 왔구나, 저걸 드디어 내 눈으로 보는구나'라는 작은 감동은 일지만 새로운 발견을 하는 빛나는 감정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고 내 마음속에서만 느껴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기쁨이 훨씬 크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다. 이제는 더 이상 멀리 가는 여행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가까운 곳의 새롭고, 낯선 곳을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그만큼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지에서의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경치를 즐기는 즐거움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고 그건 그것대로 좋긴하다.


며칠 전에 친구들과 연희동에 있는 유명한 브런치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음식을 먹고 주변 동네를 걸어 다녀보기로 했다. 골목 쪽으로 들어갔더니 오래됐지만 잘 관리된 주택가가 나왔다. 아파트에서만 몇 십 년을 살다 이렇게 고즈넉하고 오래된 주택가를 구경하니 너무 좋았다. 주변에 예쁜 카페와 가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지만 아직은 옛 모습이 잘 보존되고 관리되어 있어서 아름다웠다.


호박넝쿨이 늘어지게 자라고 있는 주택 대문 위 화단이 정겹다. 어릴 때 놀았던 집과 집 사이에 있는 작은 골목길도 있었는데 이곳은 나무도 심고 바닥에 돌을 징검다리처럼 꾸며놓고 예쁜 하얀색 철제문도 달아 삭막할 수도 있는 공간을 예쁘게 꾸며놓았다.

연희동 주택들


빨간 벽돌담에 보이는 문패가 옛날기억을 떠올린다. 우리 집도 빨간 벽돌집이었고 아빠 이름 문패가 달려있던 집 앞에서 교복 입고 찍은 중학생 때 사진이 떠오른다.


예쁜 것을 보고 잠시 멈추고 감상하니 새로운 공기가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금옥당이라는 양갱과 단팥죽 같은 팥음식을 제대로 하는 카페에서 커피와 팥빙수도 먹고 양갱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케이스가 예쁜 양갱 두 개도 샀다.

내가 원하는 여행은 그 지역에 머물면서 작은 골목길들을 아무 목적 없이 배회하는 거다. 다니면서 그저 마음이 이끄는 곳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를 찾아가는 그런 여유로움을 추구하고 싶다. 이탈리아의 한적한 시골마을이나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유명하지 않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도서관에 가보고 싶다. 사람들이 없어서 한없이 그림 속 붓의 질감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걸 그리는 순간의 작가의 숨결까지 상상해 보고 물감의 색 섞임을 생생하게 감상할 여유를 갖는 그런 여행을 꼭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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