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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Jun 25. 2024

아이의 꿈을 지켜주고 싶다

사라져 버릴 것들을 불러와 형태를 부여하고 기억하려는 노력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의 의미는 내가 찾아내는 것이다. 모두의 인정을 받아야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을 계속하고 표현해 내는 사람이 예술가일 것이다. 물론 일반인도 그런 일을 하며 삶의 의미를 지어나갈 수 있다.


이런 일들을 혼자 있을 때 한다. 그렇게 그러모은 반짝이는 순간들이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고 살고 싶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혼자서는 나를 지키기 쉽다. 그러다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고 번쩍거리는 도심을 돌아다니다 보면 너무도 하찮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이 느낌이 뭘까? 왜 그럴까 많이 생각했다.


그렇다고 힘을 앗아가는 세상에서 물러나 혼자의 세상 속에 갇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사회적 세뇌에 무방비인지 새삼 놀란다. 이성적으로 뭐가 옳고 나에게 더 좋은 것이 뭔지 알면서도 세상 속에 나서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작지만 소중한 것들은 쉽게 힘을 잃는다.


사회가 잘 돌아가도록 세뇌시킨 가치라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 자주 우울해지고 만다. 그 속에서 나만의 삶을 찾고 소중한 것을 깨닫는 지혜를 쉼 없이 배워야만 겨우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주변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닥치게 만들 세속적 성공 하나쯤은 해내야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공부를 못하면 이런저런 충고를 들어야 했다. ‘어느 학원에 가봐라’, ‘엄마가 집에서 아이 공부습관을 들여야 한다’등등. 주변의 오지라퍼들이 먹잇감 하나를 찾아 신난 듯 떠들어댄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엄마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거처럼 몰아가는 세상이다. 같은 학부모인데도 아이의 성적에 따라 모임에서의 서열이 생긴다. 친한 엄마들끼리도 아이의 성적에 따라 충고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듯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리 나의 교육관이 그렇게 심하게 학원으로 돌리지 않는 거라고 해도,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시키고 싶지 않다고 해도 그냥 공부 못하는 엄마의 변명으로만 듣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아이의 성적에 만족한다고 하면 엄마가 왜 기준을 낮추느냐며 나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자신의 극성스러운 면을 합리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첫째 아이는 글 쓰는 사람으로 아주 어릴 때부터 진로를 정했기 때문에 대학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아이가 그렇게 확고하기 때문에 나도 마음을 내려놓은 것이었는데도 주변에서 더 난리였다. 다행히 아이가 논술전형으로 괜찮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그런 충고가 사라졌다.


아이가 다른 일을 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할 수 없음에도 그런 압박을 느끼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비슷한 나이에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이야기,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동기 딸의 사진에 아무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는 내가 맘에 들지 않고 그런 일에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아이는 프리랜서로 자신의 용돈은 벌고 있고 주중에는 매일 수영으로 건강관리를 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주위에서 언제 성공하는지 점이라도 보라는 둥, 곧 김은희나 김은숙 같은 작가로 성공할 거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그렇게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아이가 혼자서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세상 같은 건 아무 의미 없는 건가, 안쓰럽게 바라보게 될 일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한순간에 이런 절망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누라 뭐라 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을 키워야 한다. 그걸 배우지 못할 때 쉬운 해결책을 따라가게 된다. 그 세상 속에 파묻혀 계속 이기기 위한 싸움을 하느라 지치고 외로워지는 인생을 살 것인지, 진짜 중요한 걸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키울지 선택해야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장미 넝쿨을 바라보는 데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삶도 있다. 사회에서 좋다고 권하는 가치 외의 것에 몰입할 수 있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


나도 아직 이런 갈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에 남편이 밖에서 누구누구의 자식이 최연소 회계사가 됐네, 의대생이네 약대생이네 이런 소식을 부러움을 섞어 전할 때 화를 내게 된다. 힘들게 그 마음을 지키고 있는데 거기에 불을 붙이는 남편의 무신경한 말들에 짜증이 나고 만다. 같은 부모인데 자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만 하는 건지 화가 난다.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번듯한 직업을 갖거나 사회에서 정해주는 인생의 수순을 따라가서 부모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자식에 대한 마음을 버리기 위해 밤마다 책을 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나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지 답답할 뿐이다.


남편 탓을 하는 이유는 나도 이런저런 모임 후 지치고 상처받을 때가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세속적 성공과 외적인 모습에 아직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힘들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혼자 지낼 때 그토록 소중하게 가꿔가는 꿈과 모든 시도들이 세상의 누군가의 눈빛 하나에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느낄 때 절망하게 된다. 한 번씩 그런 기분이 들면 ‘이런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직도 내가 정말 중요한 것을 진심으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그래서 내 딸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주변의 이런 많은 압력과 편견에 흔들리지 않고 꿈을 향한 지치지 않는 마음이 부럽다. 세상에 실망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내가 아이의 가장 큰 방해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가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맞춰나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내가 그런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인생을 사는 건 아니니까. 내가 먼저 세상의 시선을 지워나가고 진심으로 아이의 꿈과 행복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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