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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Sep 12. 2022

광화문에서

나는 광화문이 좋다. 광화문 부근을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교 때 경복궁 옆에 있는 프랑스 문화원에 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흑백 영화들을 봤다. 영화잡지에서 봤던 유명하지만 개봉하지 않던 영화들이 가끔 프랑스 문화원에서 상영됐었다. 샤를롯트 갱스브루의 <귀여운 반항아>도 거기서 봤다. 그 영화의 OST인 Ricci e Poveri의 Sara perche ti amo는 하루가 멀다 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데 그 영화를 볼 수 없어 안달이 났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문화원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도 기뻤다. 자막이 영어였는지 없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쨌든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해 생각만큼 재미는 없었다. 단지 지금 봐도 힙한 샤를롯트 갱스브루의 얼굴을 보는 걸로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불과 삼십여 년 전에 그랬다는 게  믿어지지 않겠지만 원하는 영화를 찾아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비디오로도 볼 수 없는 영화는 그래서 더 간절했다. 가끔 학교 축제 때 구하기 힘든 문제작들을 상영하기도 했다.  학교 축제 때 <베니스에서의 죽음>,  휴 그랜트의 리즈 시절을 확인할 수 있는 <모리스>,  <대부>같이 절대 상영하지 않는 영화잡지에서나 보던 영화를 가정관 소극장에서 보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지금은 유튜브나 여러 영화 플랫폼으로 어느 시대 어떤 영화라도 손쉽게 볼 수 있었지만 그때는 너무 힘들었다.


어쩌다 주말의 명화 같은 데서 우연히 멋진 영화를 접하기는 해도 그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그 영화를 본 게 꿈이 아니었는지 의심하던 때도 많았다. 유명한 <화니와 알렉산더>도 고 3 때 우연히 TV에서 보고 홀딱 빠졌는데 누가 만든 영화인지 어느 나라 영화인지 정보가 없어 애가 탔던 기억이 난다. 그냥 꿈에서 본 것처럼 한 동안 그 영화의 몇 장면의 이미지가 나에게 깊이 각인되었었다. 화니와 알렉산더가 귀신을 보는 장면, 그 귀신들이 토하던 장면, 중성적인 아이가 감옥 같은 곳에 갇힌 장면 등이 머릿속에 남았고 그 영화의 이미지가 너무 좋아서 한동안 계속 생각했었다. 그 영화의 장면 장면이 하나의 그림 작품같이 느껴져서 그 이미지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영화 잡지에서 너무도 유명한 감독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유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실험실 가운 같은 옷을 입은 여학생들이 나오는 프랑스 영화도 있었는데 아직도 그 영화의 정체를 모른다. 그 모든 것의 흔적을 따라다니느라 그렇게 프랑스 문화원과 서점들을 들락거리고 영화 잡지와 영화 관련 책들을 찾아봤다. 그 이미지들. 영화잡지에서 사진 몇 컷으로 봤던 이미지들. 잡히지 않아 더 안타깝게 사랑했던 영화 속 이미지들


지금은 핸드폰으로 몇 초 만에 모든 정보가 드러나지만 그때 같은 사랑의 안타까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려워서 더 재밌고 더 간절했던 거 같다. 영화 잡지에서 본 영화들을 볼 수 있는 통로가 정말 없었다. 보고 나면 불어라 반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원하는 영화를 봤다는 만족감에 행복했다. 그때는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없는 문제작들을 어렵게 찾아보는 거에 큰 행복감을 느꼈다.

옛날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영화를 지금은 너무도 쉽게 볼 수 있게 되니 그냥 나중에 보면 되지 그러고 오히려 안 보고 미루게 된다.


근처에 있는 불친절한 주인이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프랑스 문화원에서 영화를 보는 모든 과정이 재밌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광화문을 좋아하게 된 것이...

내가 다니던 학교가 있던 신촌에서 가까워 공강 시간에 훌쩍 다녀올 수 있어 자주 가게 되었다. 광화문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있었다. 아름다운 고궁이 있었고, 영화가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 큰 서점이 있었다. 여러 공연을 볼 수 있는 세종문화회관도 있었고 그 옆길에 있는 우동 집 지금은 없어진 하디스라는 햄버거 가게도 자주 갔었다. 그 당시에는 직접 서점에 가야만 새로운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고 내 관심을 끄는 책들을 뒤적여보고 몇 권 사 가지고 나오는 일이 좋았다. 지금 서점 앱을 들락거리듯이.


지금도 답답하거나 혼자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을 때,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을 때 광화문으로 간다. 대형서점에 들러 인터넷에서 봤던 책을 실물로 확인하고 멋진 외국 잡지나 사진집 등을 구경한다. 그리고 걷는다. 광화문부터 종로까지 걷기도 하고 을지로 입구까지 걷는다. 그 동네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좋다. 옛날 서울의 느낌, 어린 내가 살아왔던 서울. 대학생의 내가 거기에 있는 느낌이 든다.


친구들과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고 떠들며 신촌에서 광화문까지 걸어 다녔다. 나는 그때 힘들다고 왜 걷느냐고 불평을 했던 거 같은데 에너지가 넘치는 내 친구들은 그렇게 날 끌고 걸어 다녔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어도 그때까지 잘 알지 못했던 서울을 그렇게 샅샅이 경험하게 된 것 같다. 그 친구들 덕분에 광화문과 서울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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