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새로 산 노트를 펼쳤다. 노트에 모닝페이지를 쓰고 필사도 한 후 끈을 꺼내 만져보는데 끈 색까지 너무 예뻤다. 계속 비도 오고 냉방병인지 속도 울렁거리고 온몸이 아팠는데 그 색을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노트를 덮어 표지 색도 다시금 살펴봤다. 연보라색은 처음 사봤는데 생각보다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거기에 연보라와 핑크빛 꽃 그림이 그려진 마스킹 테이프로 장식을 더했더니 너무너무 예뻤다.
이 작은 물건이 주는 기쁨이 생각보다 커서 집안일을 하다가도 그 노트를 들쳐봤다. 적당한 크기와 속지의 질감과 색이 영감을 마구마구 일으킬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몰스킨 노트를 지난 몇 년간 써왔는데 최근에는 진짜 비싸도 너무 비싸져서 그만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비싼 노트는 대단한 글을 쓰는 사람이나 써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작년부터는 조금 싼 다른 노트를 썼는데 뭔가 미묘하게 기분이 달랐지만 노트가 중요한가 얼마나 충실하게 채워나가는지가 중요하지 하며 애써 무시했었다. 이번에도 쓰던 거를 다 써서 다른 저렴한 노트들을 둘러봤다. 이것저것 만져보고 들여다봤지만 맘에 드는 걸 찾기 힘들었다.
몰스킨과 가격 면에서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유명한 다른 노트도 써봤는데 이상하게 나와 맞지 않았다. 결국 다른 걸 아끼자는 마음으로 두 눈 질끈 감고 이 보라색 노트를 샀는데 역시 좋았다. 이 작은 노트를 볼 때마다 기분이 달라지고 생각의 빛이 변하는 기분이 든다.
5월에 8박 10일의 긴 여행을 다녀오고부터 미묘하게 컨디션이나 기분이 달라졌다. 그 이후에도 자꾸 여행 갈 일이 생겨 국내 여행도 4번쯤 다녀왔다. 그렇게 피로가 누적돼서 그런지 몸도 안 좋고 속은 다시 고장이 나서 2주 넘게 내과 약을 먹고도 다시 재발되고 영 몸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선지 최근에는 모닝페이지도 거의 쓰지 못했고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그런 나에게 약을 처방하듯 기분을 바꿔줄 뭔가가 필요했다. 노트 하나에 그렇게 기분이 달라질까 싶었는데 문구류 덕후인 나에겐 정말 좋은 일이 됐다. 아이들에게도 생일 선물로 더 좋은 것도 필요 없고 이 줄 없는 노트를 사달라고 이야기했다.
다른 노트보다 가로길이가 조금 좁고 속지의 색이 조금 더 노르스름한 것도 마음에 든다. 헤밍웨이와 피카소가 사용했다는 마케팅에 걸려든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아주 꼭 맞는 노트다. 매일 사용하는 물건에 이렇게 예쁨이 넘치는 건 큰 기쁨이다. 내 마음에 꼭 들어 볼 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물건을 곁에 두는 일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식구들 식사를 차릴 때에도 집에 있는 제일 좋은 그릇을 사용한다. 손님 오면 쓰려고 아끼지 않는다. 제일 좋은 컵과 그릇을 매일 사용한다. 나 혼자 된장찌개에 계란하나 부쳐 먹을 때도 제일 좋은 접시와 그릇을 꺼낸다.
거의 20년을 사용한 면기에 금이 가서 최근에 2개를 새로 샀다. 자주 면 요리를 먹는 요즘 같은 여름에 작은 기쁨을 자주 느끼게 해주는 값으로 35000원이 아깝지 않았다.
그 그릇이 너무 맘에 들어 덮밥을 먹을 때나 아이들 라면도 이 그릇에 담아준다. 이 그릇의 아름다운 쉐잎을 보라고, 테두리의 작은 동그라미 장식들이 얼마나 예쁜지 보라고 이야기하며 미소가 지어진다. 그릇 마다에 어떤 스토리가 있고 어떤 부분이 예쁜 건지 이야기해 준다. 내가 자꾸 이야기하니 억지로 그러는지 몰라도 식구들도 좋아하는 거 같다. 아이들이 혼자 먹을 때도 아무렇게나 먹지 않고 예쁜 그릇을 꺼내 먹는다.
이렇게 예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라 옷도 너무 좋아한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맘에 드는 옷을 입으면 그냥 기분이 좋다. 액세서리도 좋아해서 비싸지 않은 귀여운 귀걸이나 팔찌까지 마무리로 하고 나서면 기분 좋은 상쾌함이 느껴진다. 여행 가기 전에는 첫날, 둘째 날 뭘 입을지 적어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고부터는 그림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스스로를 맘에 들게 가꾸고 차려입는 일이 중요하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기분을 위해서 그런다. 그렇게 작은 기분들이 쌓이고 쌓여서 내 삶의 만족도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다. 이 작은 보살핌이 아주 중요하다는 걸 매일매일 더 느낀다.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냉장고 속을 시시때때로 정리하는 것도 다 나를 돌보는 일이다. 주변과 나를 돌보고 되도록 취향에 맞는 아름다운 것들로 주변을 채우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네 방의 상태가 네 머릿속 상태야”라고 아이들에게도 자주 이야기한다. 아이가 자기 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놓인다. 아이의 기분이 좋아지도록 예쁜 오브제 하나, 좋은 향기가 나는 샤쉐를 준비하기도 한다.
원래는 인공적인 향을 싫어해서 향수도 잘 뿌리지 않는데 얼마 전 경주에 갔을 때 호텔에서 나는 향기가 너무 좋아서 찾아봤더니 그 호텔에서만 파는 샤쉐였다. 그걸 몇 개 구입해 내가 주로 앉는 소파 주변에 걸어 놨더니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살짝살짝 나는 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이런 상태라 알뜰한 사람에 비해 돈을 많이 쓰는 게 맞을 것이다. 이런 것에 쓰는 돈도 낭비라고 생각하고 알뜰하게 아껴서 통장 잔고나 아파트 한 채를 더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난 지금 현재 예쁜 것들을 보며 느끼는 순간순간의 기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 거 같다. 돈을 쓰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도 더 많이 찾으려 하고 내가 사용하는 물건에서도 이왕이면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단지 취향을 찾을 때 이게 마케팅에 걸려든 건지 진짜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를 구별할 지혜를 갖추기 위한 노력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게 또 다른 내 고민이기도 하다. 비싸고 좋은 것일수록 쾌적하고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3성급 보다는 4성급이, 4성급 보다는 5성급 호텔이 쾌적하고 향기롭고 아름답다. 당연히 기분이 좋아진다. 명품을 보니 역시 더 예쁘고 오래 써도 싫증 나지 않을 거 같다. 역시 비싼 것이 비싼 값을 하는 것도 맞다.
그게 나의 오랜 고민이다. 내가 진짜 안목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비싸고 좋은 게 그냥 좋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진짜 나의 안목과 취향을 찾는 일이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거 같다.
계속 소비를 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소비해야 하는지의 취사선택의 기준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살 때 잠깐의 즐거움 때문인지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 줄 수 있어서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를 고민한 후의 현명한 소비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고민을 계속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