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행복한 일이 연달아 생겼다. 날씨는 춥지만 마음이 따뜻해지고 풍족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런 기분은 다른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작용 없는 은은한 행복감이다.
저번 주에 친한 후배들과 목포 여행을 계획했으나 갑자기 추워지는 데다 비까지 내린다는 예보에 가까운 곤지암리조트로 일정을 변경했다.
비수기라 4명이 묵을 수 있는 아주 쾌적한 숙소를 좋은 가격에 예약할 수 있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은 움추러들었지만 사람들이 많지 않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리조트에서 하루 묵고 다음 날 이천에 있는 설봉공원과 그 주변 도자기 박물관, 월전미술관을 둘려보기로 했다. 월전미술관에는 원문자라는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분의 그림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새와 동물들을 한지에 그린 그림이었는데 은은한 색감과 세부적인 묘사가 탁월해 정말 아름다웠다.
'이런 수묵채색의 화조화를 그리시는 분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설명을 읽는데 깜짝 놀랄 이야기가 있었다. 저번 주에 브런치에 쓴 그림의 단순화에 대한 나의 고민과 같은 고민을 했었고 추상화로 방향을 돌렸다는 이야기였다.
“화조화를 그리면서 대상에 얽매이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져 대상을 생략하거나 단순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해 보았지만 만족할 수 없어서 결국 추상적 표현을 선택하게 되었어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과연 그 이후의 작품에서는 그 전의 부드럽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해 화려한 새 그림을 그린 같은 작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화풍을 구사하고 있었다. 평면적 그림이 아니라 한지를 구기고 색을 입혀 만들어내는 입체적인 작품이었다. 그 이후 최근에는 사진 기반 디지털 이미지에 먹과 채색을 가미하는 한국화와 미디어아트를 결합한 실험적 작품으로까지 변화를 거듭하는 분이셨다.
60년간 꾸준히 고민하는 대작가의 발뒤꿈치에도 따라갈 수 없는 초보자이지만 같은 고민을 했다는 게 반갑고 신기해서 같이 간 후배에게 이야기했다. 그 후배는 늘 내 글을 읽고 자주 이야기 나누는 친구라 최근 그 글에 댓글도 달아주고 공감해 줬기 때문이다.
후배도 그 화가의 글을 읽으며 "일반인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을 고민을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하게 되는 구나" 라며 신기해했다.
나는 그 순간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전적으로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게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건성으로 “그렇구나. 그렇지”라고 친절하게 이야기할 순 있어도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
그 후배와 다른 후배 한 명도 늘 브런치의 글을 읽고 현실에서도 공감 가는 부분이나 내용을 화제에 올리곤 한다. 내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눌러주고 응원해 주는 친구들은 몇 명 더 있지만 이 친구들처럼 거의 모든 글을 읽고 공감해 주는 사람들은 드물다.
나만 느끼는 이런 내밀한 감정이나 고민들에 딱 맞춤으로 공감해 줄 수 있는 친구를 가진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대화와 감정들은 오래도록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이 여행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미술관에서 기분 좋게 밖으로 나왔는데 어디선가 풍경 소리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주변에 있는 도자기 박물관 앞 설치물에서 나는 소리였다. 우리가 온 걸 환영이라도 하듯이 귀여운 재잘거림 같은 소리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만들어 내는 그 소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환영해 주는 환영 노래 같은 거였다. 좋은 사람들이랑 다닐 때는 늘 그런 행운을 만나곤 한다. 그리고 그런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 그걸 행운이라고 느끼는 거 같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남는 것이 많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연말에 선물 같은 또 하나의 행복한 일은 한통의 전화였다. 그 친구는 오래도록 기다린 재건축 아파트에 입주를 앞두고 있다. 이사를 위해 집을 정리하느라 힘들다고 징징대다가 갑자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길래 “왜 그래? 무슨 이야기 길래 무게를 잡아?”라며 농담으로 넘기려 했다.
친구는 “정리를 하다가 네가 선물한 책이 나왔어. 책을 받았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을 못 했는데 갑자기 그 책을 보는데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고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라는 내용이었다.
근데 그 말의 무게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 준 사람에 대한 뭔가 서글프면서 아름다운 감사함의 진심이 확 느껴졌다. 가끔 책을 소개해달라는 친구나 지인에게 책을 선물로 보내준 적이 있고 그 친구들도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친구의 이번 말의 무게는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 친구도 엄마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받았고 엄마가 돌아가셨음에도 아직 그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문제로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고 읽고 도움이 되었던 책을 진심으로 권해주고 싶어 카톡 선물하기로 보낸 적이 있었다.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라는 박미라 작가의 책으로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고 필사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저자의 말대로 글을 쓰면서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다. 여전히 힘들어하는 친구가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라는 진심이 전해졌다는 것에 내가 더 고마웠다.
비록 그 책이 나만큼 와닿지 않았어도 그 책을 보낸 내 마음만은 순수하게 받아주고 따뜻함을 느꼈다는 느낌이 “정말 고마웠어, 그 말을 꼭 하고 싶었어”라는 짧은 말속에서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 친구의 고통이 많은 부분 공감 되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답답하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그 일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충고라고 하는 말들에 오히려 상처를 줄까 싶어 말하기도 어려웠고 이제 그만하라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어떨 땐 친구의 그런 모습에 나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나도 여전히 술에 취하거나 정신 차리고 있지 않으면 똑같은 레퍼토리를 주변사람에게 재생하는 일을 하고 있기에 그 마음을 잘 알고 그런 친구의 모습에 힘들기도 했다.
그녀가 자신만의 길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보낸 작은 책이 잠시라도 그 상처를 알아봐 주고 따뜻한 눈길로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걸 알게 돼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56년을 살아보니 이런 순간들이 얼마나 희귀한지 알게 됐다. 이건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순간이다. 이런 행운을 많이 만들어내고 느끼고 싶다. 이것이 진정 부자고 노후대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난 정말 행운아인 거 같다. 이런 나의 사소한 행동과 말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호응해 주는 친구들과 후배들이 있어 내 노후는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