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의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책에서 아름다운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변치 않는 오래된 꿈은 반드시 보석이 된다”라는 문장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진짜 보석을 감상하듯 한참을 들여다봤다. 조금 있다 그 페이지를 다시 펼쳐 한 자 한 자 정성껏 노트에 적기도 했다.
그 문장을 반복해서 읽다 보니 오래된 꿈을 기억하고 소중히 돌보는 사람이 세상에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생활에 쫓겨 현실적인 직업을 갖고 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어도 매일 밤 남몰래 꺼내보는 보석 같은 “꿈”이 그의 삶의 북극성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직업을 갖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어디를 가든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낯선 곳을 헤매다 길을 잃어도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는 마음속 별이 되어줄 것이다.
내가 그랬다. 어릴 때부터 ‘예술’이라는 모호한 꿈의 모습을 마음 한 구석에 늘 간직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그걸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 마음이 그런 사람들을 알아보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그 주변을 맴돌게 했다.
그 반짝이는 보석이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다 연결 지어주는 중심이 되었다. 예술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전공을 공부하고 강의할 때도 문학과 예술의 색이 입혀진 나만의 방식의 유아교육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어느 날이 생각난다. 한창 프랑스 문학과, 초현실주의에 빠져 그런 책들에 파묻혀있었다. 그 책들은 나를 알 수 없는 갈망으로 불타게 만들었다. 그냥 읽는 것만으로는 끝낼 수 없는, 하지만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랐던 그 마음들이 기억난다.
그 가득 찬 마음을 글로 쓰면 아름다운 뭔가가 만들어질 거라는 기대감으로 노트를 펼쳤다.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감상이 가득 차올라 바로 뭔가가 만들어질 줄 알았는데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날의 충격이 너무 커서 30년 넘게 글을 못썼다.
그날처럼 막막하고 답답할까 봐 글쓰기가 두려웠다. 소설을 써야 할지, 에세이를 써야 할지, 그냥 책에 대한 감상을 써야 할지 몰라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이파리 몇 개를 그리고 노트를 덮었던 그날의 기억이 불쾌하게 남아있다.
쓰고 싶었지만 뭘 쓸지 알 수 없던 긴 나날들, ‘난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구나’를 명확하게 깨닫던 날, 날개 없이 날려다 무참히 바닥으로 추락했던 어린 날의 나처럼 상처만 입은 그날의 기억은 슬프게 남아있다.
난 날개가 없는 사람이라는 명확한 깨달음은 꿈을 접게 만들었다. 그 꿈은 절대로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냥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직업을 갖고 그냥 감상만 하면서 살아야겠구나’라는 결심을 했다. 그런 생각으로 살았기에 어떤 일에든 절실함이 없었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그래서 학점이 나빠도 부끄럽지 않았고, 내 의지와 맞지 않은 곳에 취업을 해도 상관없었고, 대학원으로 도망쳤을 때도 남의 삶을 사는 거 같았다. 어차피 그런 일들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아니고 태어났으니 살아야 하기에 해내야 하는 의무감만 남은 나날이었다. 어떤 목표도 기쁨도 없었다.
날개를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몰랐던 나는 날개를 갖고 태어나지 못한 사람임을 처음 깨달은 당혹감과 절망감속에 오랜 시간 빠져있었다.
그때 누군가 날개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더라면, 깃털을 하나하나 만들어 어설퍼도 퍼덕일 수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 주변인의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내 인생을 온전히 살지는 못했어도 여전히 날개를 단 사람들에 대한 동경과 사랑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작품을 향유하고 꿈꾸기는 계속되었다. 그런 시간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작은 날개가 만들어졌나 보다.
병아리 날개만 한 날개가 만들어지자 나는 시늉을 하게 됐다. 아주 긴 시간이 쌓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직 천사의 황홀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날개는 아니지만 날아갈 곳을 응시하고 있다.
나의 날개는 나도 모르는 새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열망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이어지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나의 생활 모든 곳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이제는 그 꿈이 드디어 보석이 돼서 내 삶에 존재감을 빛내고 있다. 남들이 다 갖고 싶어 하는 다이아몬드나 에메랄드 같은 대단한 보석은 아니지만 소박하게 내 삶에서 빛을 내며 나를 비춰주고 있다.
그 빛으로 비춰보면 내 삶의 모든 것이 다 다르게 보인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것을 더 잘 알아보게 되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찾게 됐다. 내 핸드폰에는 그런 귀엽고 예쁜 것들의 사진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어딜 가나 아름다운 것들을 찾느라 분주하고 저녁에는 낮에 모은 보물 같은 장면들을 보며 이걸 글이나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궁리하는 이 생활이 좋다. 작은 날개지만 이렇게 매일 다듬고 만들어나가는 일상이 보석 같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