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알려 준 세상

by 박수종

그림을 그리고부터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매일 느낀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싶어 그림을 그린다. 다른 사람의 그림도 더 잘 보이고 그 마음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심하게 감상하고 디테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감상의 지평이 확 넓어지면서 삶이 흑백에서 칼러로 변신한 느낌이 든다. 어릴 때 흑백 텔레비전을 보다 처음 칼라 텔레비전을 봤을 때 같은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편평했던 무채색 세상에 부피감과 색깔이 입혀지고 따뜻함이나 부드러움, 슬픔과 산뜻함 같은 다채로운 감정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내 세상에는 없던 새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알게 된 후 특이한 새를 발견하는 일이 많아졌다. 며칠 전에도 동네에 점심 먹으러 나갔다가 흔히 볼 수 없는 예쁜 새를 발견했다. 처음엔 그냥 참새인가 하면서 한 참을 쫓아다녀 보니 처음 보는 새였다. 잠시 나무 위에 앉은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카톡 프로필로 저장했다.


이미경 작가의 그림을 본 후 오래된 집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서 오래된 집에서 피어나는 어린 시절 추억과 아름다움에 한동안 사로잡혔었다. 그런 집들을 찾아 서울의 골목길을 찾아다니고 한참 집 그림을 그렸다.


인스타그램에서 커피 잔이나 디저트 그림을 보게 됐는데 그것도 내 취향이었다. 빈티지한 분위기의 카페에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커피와 연관된 것들을 그리는 일은 많은 행복감을 주었다. 예쁜 커피 잔, 디저트, 특이한 스타벅스 건물 등 그릴 것이 많았다.


홍콩의 김밥천국이라고 불린다는 차찬탱에서 볼 수 있는 밀크티 잔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고 그린 적이 있다. 그림으로 그리고 나니 이번 홍콩여행에서 그 잔의 실물을 영접하고 밀크티를 마셔야겠다는 사소한 계획도 여행의 기대감을 높여 주였다.

차찬탱의 밀크티 잔

아쉽게도 같이 간 사람들의 취향과 일정상 그 밀크 티 잔을 직접 볼 기회가 없어 내심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묵었던 호텔 로비에 그 잔의 그림이 걸려있는게 아닌가?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작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물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라도 마주치게 만들어준 것일까?


너무 반가워서 같이 간 지인들에게 내가 그린 똑같은 잔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 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 함께 그 그림과 내 그림을 한참 감상하며 이야기 나누었다. 내가 그 잔을 그리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호텔 장식품에 불과할 그림이 잊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가 됐다. 그림을 그리고부터 그런 작지만 멋진 순간이 많아졌다.


그림은 그런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던 세상도 발견하게 해 주고 다른 사람들과 그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든다. 이런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인정욕구와는 다르다. “여러분, 내가 찾은 이 이쁜 것 좀 보세요. 우유처럼 부드러운 느낌의 쉐잎과 젖소의 얼룩무늬와 풀밭의 초록색과 빨간색의 조화가 정말 귀엽지 않아요? “라고 알려주고 싶다.


호텔에서 밀크티 잔의 그림을 발견한 후 다시금 내 그림 속 잔의 귀여움에 흠뻑 빠져든다. 그런 시간과 기분을 돈을 주지 않고도 쉽게 살 수 있다. 우리가 큰돈을 들여 열몇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야 느낄 수 있는 즐거움에 뒤지지 않을 만족감을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1월에 간 홍콩과 마카오 여행에서는 구도심의 골목길이나 집들은 많이 보지 못했다. 같이 간 사람들의 니즈와 조정을 하다 보니 화려한 호텔의 애프터 눈 티와 맛집과 쇼핑을 즐겼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여전히 돌밥에서 자유롭지 못한 주부들의 살림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나라의 오래된 집이나 특별한 풍경은 발견하지 못해 애프터 눈 티 세트와 TWG 티룸의 모습을 그렸다. 늘 식구들 수발만 들다 공주님이라도 된 듯 대접받는 기분에 들떴던 기분을 담아 그렸다. 디저트의 예쁜 모습에 감탄하고 우아하게 티 한잔을 들고 사진 찍는 공주놀이에 흠뻑 빠졌든 그 순간의 행복감이 그림을 볼 때마다 되살아난다.

최근에 읽은 <데이비드 호크니, 무엇이든 예술이 된다>라는 책에 “나는 단순하게도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나는 혼자서도 잘 논다. 시간을 보내기 위한 무엇가가 필요하지는 않다. 나에게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평소에 나도 그런 생각을 자주 했기에 깊이 공감했다. 이번엔 어떤 프로젝트로 그림을 그려볼까 라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려보고 인터넷 검색을 하곤 한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는 오래된 골목길을 다니면서 옛날 집들을 그렀고 또 한동안은 예쁜 커피 잔과 새가 같이 있는 장면을 그렸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그런 따뜻한 느낌의 사물과 장면을 그리거나 카드를 만들면서 크리스마스의 동심과 따뜻함에 푹 빠지곤 했다.


계절과 상황에 따라 새로운 프로젝트를 고민하고 계획하는 시간도 좋고 그걸 하나씩 실현해 나가는 것도 재밌다.


그림을 그리면서 평소에 생각했던 사물의 모습과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사물과 자연 그대로를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색으로 보게 된다. 예전의 나에게 투명한 유리잔은 아무 색도 없는 밋밋한 회색이나 하얀색이었다. 그런데 투명 컵을 그리다 보니 도자기 잔이나 색이 있는 컵보다 훨씬 더 다양한 색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투명하기에 속에 든 음료의 색, 주변 사물이 비쳐서 만드는 색, 햇빛이 드는 위치에 따라 다른 무수히 많은 색을 볼 수 있게 됐다.

이 그림에서도 도자기 잔의 라테를 그릴 때보다 투명 컵의 아메리카노를 그릴 때 더 많은 색을 썼다.

지금 그리고 있는 이 그림의 반투명 컵을 그릴 때도 6~7가지 색을 썼다.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 더 많은 색이 사용될 예정이다. 라테가 담긴 빈티지 밀크 잔보다 몇 배나 공이 든다.


카페에서 이 빈티지 밀크 잔을 보자마자 우리 모두 “와~ 너무 예쁘다. 옛날 우리 집에 있던 건데” 하면서 환하게 웃던 친구들의 반응에 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이렇게 그림으로 남긴 장면들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그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마음을 움직인 이유와 정확한 형태와 색을 찾기 위해 보고 또 보는 그 과정을 경험하고 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깊은 관찰과 표현은 감각을 좀 더 날카롭게 만들어 주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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