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하루의 온도 >

- 헤일리 티프먼의 전시회를 보고

by 박수종

3월 첫 주에 마곡 마이아트 뮤지엄 원그로브에서 하는 헤일리 티프먼의 전시회를 보고 왔다. <평범한 하루의 온도>라는 부제가 붙은 전시회였다.

헤일리 티프먼은 95년생 일러스트레이터로 낯선 작가였지만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그녀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애완동물을 키우며 혼자 사는 공간에 대한 로망이 있는 나에게 무척 매력적인 그림이었다. 약간 톤다운 된 다양한 색을 사용한 편안한 그림이 내 취향이었다.

처음 나의 눈길을 끈 건 그런 아기자기한 방안의 모습이었지만 직접 가서 본 많은 그림들에서 새로운 시선과 영감을 받았다.


전시회의 첫 번째 섹션은 <멈춰 있는 시간>이라는 주제였다.

“ 티프먼의 정물, 공간 작품은 사건보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온기와 기류에서 출발한다. 눌린 쿠션, 책상 위의 작은 물건, 창문을 타고 들어온 빛 같은 사소한 흔적들은 누군가 머물렀던 시간의 여백을 조용히 보여준다.


티프먼은 감정의 밀도에 집중한다. 부드럽게 쌓인 색면과 사물 사이의 간격, 은근하게 번지는 색채는 방 안에 머물던 정서의 리듬을 시각화한다. 재현된 장면이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먼저 떠오르는 감정의 온도를 화면에 옮기는 방식이다.”


이 섹션의 그림 속 다양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방안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빛, 버스 안에 들어 온 석양 빛, 한낮의 태양빛이 입혀진 건물의 색, 밴드 공연을 비추는 술집의 조명 같은 다양한 빛을 느껴지는 대로 표현한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섹션 2의 주제는 <가까이 머물다>였다. “ 가까이 있으면서도 닿지 않는 거리, 함께 머물지만 서로에게 도달하지 않는 온도, 티프먼은 이러한 미세한 감정의 간극을 사람의 몸짓과 공기의 흐름 속에서 포착한다. 얼굴이나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도, 손끝의 각도와 몸의 기울기, 앉아있는 자세만으로 관계의 온도가 은근히 전해진다. ”


그래서 티프먼은 그림을 그릴 때 얼굴을 생략하거나 표정을 최소화한다고 한다. 그녀에게 감정은 자세 속에 , 발끝의 각도 속에, 두 사람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택하는지 같은 곳에 담겨 있다고 한다. 복잡한 도시 안에서도 어깨의 아주 미세한 기울기 하나가 친밀함, 고독, 동행 같은 감정들을 조용히 말해준다고 한다.

“ 도시, 카페, 지하철처럼 일상의 속도 속에서 스쳐 지나간 시선, 짧게 공유된 공기, 멀어지는 걸음의 리듬은 장면의 정서를 만든다. 감정의 잔여가 화면에 남아 잇는 이유는 티프먼이 관계를 설명하려 하기보다 느껴지는 온도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


이 구간에 있는 그림들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일상에서 매일 부딪히는 지하철이나 버스 속 사람들, 거리나 카페, 상점 안 사람들에게서 감정의 공기를 읽고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고 멋지게 표현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대상의 직관적인 아름다움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계의 온도나 기억 속 감정까지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걸 깊게 깨달았다. 책에서 어떤 장면이나 상황 묘사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감정이나 관계의 온도가 한 장의 그림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시간이었다.


이 그림들을 보자마자 비슷한 장면의 내 사진들이 생각났다. 같이 외출할 때 아직도 내 시선을 끌고 사진 속에 저장하고 싶어지는 대상은 다 큰 자식들이다. 지하철 안, 버스 안, 비행기 안에서 찍은 많은 사진들이 생각났다. 이 전시회를 본 후 그 사진들을 찾아봤다.

그중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몇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최근에 아이들과 마을버스를 타서 나는 딸과 2인 좌석에 같이 앉고 둘째 아이 혼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큰 애와 “쟤는 왜 저래?”하면서 장난스럽게 찍은 사진이다.


그 장면을 그렸는데 생각보다 맘에 들었다. 그림으로 그릴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사진이었는데 버스 안 풍경, 창밖에 비치는 아파트의 모습들이 생각보다 예뻤다.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 아이의 뒷모습이 아직도 귀엽다.


전시회를 보고 온 후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만드는 점원들의 옷차림과 움직임, 카페에서 즐겁게 대화하는 사람들, 지하철과 버스 안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의 제스처,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온기와 감정과 이야기가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처음으로 세상을 배우는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 든다. 진짜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했겠지만 지금은 생생하게 보면서 의식적으로 배운다는 점이 다를뿐이다.


전시회에서 티프먼의 첫 그림을 봤을 때 디지털 드로잉이라 사실 조금 실망했다. 내가 전시회에 가는 이유는 작가가 어느 시간 속에서 직접 종이에 그렸다는 것이 느껴지는 손 그림을 직접 보는 감동을 느끼고 싶어서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 백, 수 천 장을 손쉽게 매끈하게 프린트 할 수 있는 그림의 질감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작품 한 작품 설명을 읽고 그 시선으로 그림을 보자 그런 아쉬움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림에 빠져들었고 티프먼이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5번째 섹션에서는 디지털드로잉임에도 내 마음을 이토록 움직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아카이브는 티프먼의 작품 뒤에 천천히 축적되어 온 감정과 관찰의 시간을 드러낸다.

스케치, 드로잉, 컬러 스터디, 노트, 사진과 영상은 일상 속 순간들이 어떻게 작가의 언어로 축적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티프먼은 인상적인 장면을 오래 붙들기보다, 빠르게 그려두며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꺼내 보는 방식을 택한다. 이 기록들은 완성작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감정이 잠시 머무르고 가라앉는 지점으로 작동한다. 특정한 날의 빛, 사람의 제스처, 스쳐 지나간 풍경의 색감은 기록 속에 한 번 더 머물렀다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작품으로 되살아난다.”

디지털드로잉 전에 무수히 많은 스케치를 하고 경험들을 수집한다.

“<남겨진 일상들>은 전시장에서 마주한 장면들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쌓여 왔는지에 대한 응답이다. 완성된 그림이 감정의 응축이라면 아카이브는 감정과 관찰이 처음 모습이 드러내는 자리이다. 이 마지막 흐름을 통해, 티프먼의 작업은 단일한 이미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 감정이 천천히 축적된 긴 시간의 결과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식은 디지털 드로잉이었지만 축적된 시간과 감정들, 그 한 장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스케치와 다양한 방식의 색표현의 과정이 그 이미지에 응축됐음이 느껴졌다.


이런 전시회를 통해 계속 배운다. 그림에 관심을 갖고 직접 그리면서 배워가는 과정이 경이롭고 즐겁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수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관점을 배우겠지? 세상을 더 깊고 넓게 보는 법을 어떤 방식으로 배울까?’ 궁금해졌다.


단편적 이미지에 갇힌 내 그림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최근에 읽고 있는 Art spirit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그림이라는 게 단지 기술을 연마하고 완성됐을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경험하고 그 경험과 감정이 표현될 수밖에 없는 순간으로 자신을 이끌어서 그 에너지의 힘이 어떻게든 잘 그릴 수 있는 기술과 방법을 찾도록 하라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선 작가 자신이 매력 있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도 경이로운 순간을 자주 포착할 수 있고 미세한 감정도 그것만의 밀도를 찾아낼 수 있도록 감각을 벼르는 삶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야 그런 고민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다 보니 ‘예술학교에서는 이런 고민들을 같이 토론하고 배우고 연습하겠구나, 내가 모르는 엄청나 예술의 세계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걸 본능적으로 빠르게 감지하고 표현하는 천재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 재능도 있는데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깊이는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근데 사실 궁금할 뿐이지 혼자서 조금씩 터득해 나가며 그 세상 속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는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다. 스스로 발견해 낸 새로운 사실들, 감정들, 서서히 드러나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에 감탄하며 알아보는 지금도 충분히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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