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십몇 년 만에 친척 어른들과 어머님의 모습을 너무도 닮은 사촌 동생 분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 아버님과의 러브스토리 등을 그분들에게서 조각조각 듣게 되었다.
생전에 아버님을 싫어하고 힘들어하셨는데 옆집에 살던 아버님을 어머니가 먼저 좋아하시고 결혼시켜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어머님에게도 옆집 오빠에게 설레던 꽃 같던 소녀시절이 있었구나, 늘 한결같으시고 허튼소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던 단아한 분에게 그런 열정이 있었다니 하고 놀랐다.
교회에 다니실 때도 뭔가 만들거나 발표하는 시간에 굉장히 적극적이고 열심이셨다고 지인 분들이 전해 주셨다. 늘 뒤에서 자식들 챙겨주시고 본인의 욕구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어머님의 본모습에서 손녀인 내 딸의 적극적이고 호기심 많은 성격을 볼 수 있었다. 요즘 세상에 태어나서 사회생활 하셨다면 그 누구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그 많던 열정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평생 어머님에게서 ‘엄마’라는 한 가지 역할의 면밖에는 보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조금 더 일찍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알던 어머님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분인 거 같았다. 진즉 알았다면 그냥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어머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에서 작가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버지가 태어난 일본의 중학교에 찾아가는 일화가 나온다. 부모님의 고향, 다니던 학교, 어린 시절 친구들, 부모님의 젊은 시절에 대해 피상적인 내용밖에는 잘 알지 못하고 알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 자신을 알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기회가 사려져 버렸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기억을 잃었다.
살아계실 때 그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아버지와 시부모님 장례를 치르면서 친척 분이나 친구 분들에게 듣는 이야기에 부모님들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되었다.
아빠 친구분이 들려주신 아빠에 대한 이야기들. 내가 결혼하고 바쁘게 사는 사이 아빠는 친구 분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산에도 가시고 맥주도 한 잔 하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잘 지내셨다고 한다. “이렇게 몇 년 만 더 살면 좋겠다”라고 하셨다는데 갑자기 가 버리냐고 슬퍼하셨다. “치매에 걸린 집사람이 불쌍하다”라고 우셨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나에게는 “괜찮다. 엄마도 아직은 괜찮다”라고 덤덤하게 말씀하셨는데 친구들 앞에서는 약해진 모습을 보이셨다는 걸 듣고 마음이 아팠다. 부모님을 나의 엄마, 아빠의 모습으로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분들만의 인생과정과 생활이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렇게 돌아가신 후에나 알게 되는 부모님의 완전한 한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일찍 알고 부모 자식관계를 넘어서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나를 늘 못 미더워하셨고 성인이 되어서도 걱정 끼치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30대, 40대가 되어서도 모든 일에 간섭하고 내 살림과 가정사까지 엄마 뜻대로 하지 않으면 화를 내셨다. 엄마에게 받은 상처가 많다 보니 인간적인 이해를 할 기회조차 갖고 싶지 않았다.
나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인 부모님을 이 세상 누구보다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는 부모님 이야기를 같이 할 형제도 없다. 친척 분들이 계시지만 한계가 있다. 나를 찾아나가다 보면 그 끝에는 늘 부모님이 가장 크게 존재하고 계셨다. 그런데 부모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거기서 멈추게 된다. 내가 받은 상처에만 머물러 있었다. 거기서 벗어나는 과정에 그런 사소한 부모님의 인생 이야기가 필요하다. 내 입장에서만 알고 있는 편향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상황과 다른 시간에 있던 부모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찍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게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