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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May 16. 2023

수동적 능동성을 배우다.

- <여자의 심리코드>에서

대학생 아들은 얼굴에 여드름이 하나라도 나면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하며 피부과에 가서 짠다, 약을 바른다 하며 법석을 떤다. 외모에 신경을 너무 많이 쓴다. 그거의 반의 반 만이라도 학점이나 자신의 발전을 위한 일에 신경 썼으면 하는 마음이 한가득 올라온다. 첫째인 딸은 드라마 보조 작가로 일하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바쁘고 힘든데 모처럼 쉬는 날에는 좀 쉬면 좋으련만 친구들 만나 술을 진탕 마시고 새벽에 들어오고 토하고 다음날 하루종이 잔다.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 명은 자기 관리에 너무 과하게 신경 쓰고 한 명은 너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다. 적당히 섞었으면 좋으련만 내 뱃속에서 나왔지만 어쩜 저렇게도 양 극단의 성향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다 컸는데도 이런 사소한 일들이 눈에 거슬린다. 고치길 바라는 마음이 잘못됐음을 알지만 볼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음이 답답해지는 일을 막을 수 없다. 그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심호흡을 하고 ‘그래 저 아이들은 타인이다. 그냥 그대로 인정해 주자. 다 운명이다’ 이런 말들을 되뇐다. 여러 번 이야기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사실 내가 옳다는 확신도 없다.


얼마 전 대학교 2학년 때의 일기장을 찾아 읽었다. 그동안은 너무 유치하고 꼴 보기 싫어서 거의 다 버리고 몇 권만 남겨놨지만 한동안 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궁금해져서 꺼내서 읽어봤더니 나도 “얼굴에 여드름이 나서 밖에 나가기도 싫다. 여드름 안 나게 늘 11시에 잔다.”라는 글이 있었다. 지금 아들이 하는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나도 고등학교 때 나지 않던 여드름이 대학 들어가고부터 확 퍼져서 대학 내내 피부과에 다녔다. 내 친한 친구 중에 나와 함께 우태하 피부과에 같이 가보지 않은 아이는 없을 정도였다. 그걸 잊고 아이를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니...  외모가 맘에 안 들고 뭔가 결점이 발견될 때 사실 사람 만나기도 싫고 신경이 온통 거기에 쏠린다.


일기장과 같은 상자에 있던 대학 학생수첩들을 보니 결혼 전까지 딸처럼 허구한 날 친구들과 락카페가고 술 마시고 돌아다니고 놀았다는 걸 알게 됐다. 과거는 미화된다고 '알바도 하며 통금 시간이 있어 일찍 일찍 다녔다'라고 좋은 점만 기억했는데 어지간히 술 마시고 놀러 다녔더라. 간 곳이 거의 락카페와 술집이름이었다. 나는 그랬으면서 50대의 시선으로 20대의 아이들을 보며 왜 저렇게 철이 없나 왜 저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시간을 낭비할까라는 생각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눈에 걸리는 아이들의 각각의 문제행동 두 가지를 난 20대 내내 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갑자기 성인군자에 모범생이 된 양 굴었다.


세상의 기준에서 잘 키웠다는 것, 성공하게 만드는 것이 부모의 일이 아니라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 기준을 끊임없이 내려놓고 점검하고 아이에게 다가가며 새로 세우는 일이 부모의 역할인 것 같다.


그 모든 기대와 기준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아이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에 몰두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아이들의 문제가 보일 때 내 기준이 어떤지 왜 이런 답답하고 속상함이 밀려오는지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부족해 보이고 아직도 내 눈에 보이는 아이들의 결함들이 진짜 결함이 아님을 마음에 새기고 내가 강력한 기준과 경계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요 며칠 이런 생각들을 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박우란의 <여자의 심리코드>라는 책에서 위안이 되는 문장을 발견했다. <나의 해방일지>의 구 씨가 알코올중독자처럼 술을 마시거나 떠날 때조차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봐주는 염미정의 예를 들면서 “사랑의 이름으로 대상의 증상을 제거하려 들거나 침범, 요구, 통제하려 하지 않고 증상 그대로를 존중하고, 한 주체를 전혀 침범하지 않는 태도”가 정신분석가의 모습과 닮았다고 이야기한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혐오스러운 증상을 가졌든 그것보다 너의 존재가 중요할 뿐이야”라고 말하는 듯하다고 했다.


“상대에게 자신의 요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해 악을 쓰거나 내가 원하는 네가 되어 주지 않는다고 집요하게 늘어지며 울부짖지 않고 모든 판단과 개입을 멈추고 그냥 상대를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이것이 ‘수동적 능동성’이며 이를 발휘하기 위해 한 주체가 눈앞의 대상에 우선해 자기 자신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지, 그래서 결국 자아 스스로의 욕망을 포기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관계 맺음은 타자가 타자가 되도록 허용하고 결국 자기 구도에 가까운 수동적 능동성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요청합니다”


어쩜 바로 나에게 전해주는 현명한 조언의 말들이었다.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들에 대한 답이 이렇게 바로 책이나 기사, 누군가의 이야기 등에서 발견하는 일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딱 맞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 내가 찾는 해답을 발견하는 느낌이다. 아이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의 기준에 맞지 않고 거슬릴 때도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며 수동적 능동성을 열심히 발휘하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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