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유난히 일찍 잠자리에 든 날, 하필이면 남편은 평소보다 늦은 퇴근을 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편은 웬일로 먼저 캔맥주를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간단히 차려낸 늦은 식사와 맥주 한 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오늘나갔다 왔어?"
"나가긴 어딜 나가~호야 감기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코로나 때문에 산책도 못 가게 하면서?
"꼭 나갈 일 있으면 마스크 잘 쓰고... 별 일 없었지?"
"음... 아무 일도 없는 게 이상할 만큼지나치게 평소 같아."
그 날 남편은 늦지 말았어야 했고, 술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괜찮냐고 묻지 말았어야 했고, 난 그의 관심을 기다렸다는 것을 들키지 않았어야 했다. 복받치는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나 왜 울지? 미안... 오늘 정말 평범한 하루였는데..."
주체하지 못하고 꺼이꺼이 울어 젖히는 나를 보며 남편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을 그렇게 울다 가까스로 진정이 되어가니 허탈함이 몰려왔다.
"되게 바보같이 울어버렸네."
"하나도 바보 안 같아. 예뻐."
왈칵 쏟아내고 나니, 뒤죽박죽 섞인 채 밑바닥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던 잡다한 감정들이 보였다. 그대로 두면 당장이라도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눈물, 콧물로 범벅된 퉁퉁 부은 얼굴조차 예쁘다고 말해주는 그이라면 불완전한 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 있지 않을까.
"나 생각해보니 조금 지쳤던 것 같아. 호야 입원했을 때 사실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어. 그런데 병원에 있는 동안 둘째 임신 소식 알고 다시 유산될까 봐 너무 무서웠어. 그래도 좋은 생각만 하고, 마음 다잡으면 이번엔 아기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나 때문에, 내가 부족한 엄마라 임신이 잘 안 되는 건가 싶고 정말 많이 속상했어.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몇 달째 강의도 없고, 그만큼 경제적으로도 힘든데 자기한테는 티 내기 싫고...엄마도 혹시 여윳돈있는지 물어보는데 내가 선뜻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뭐랄까... 여러모로 내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어.이 상황도, 아무것도 못하는 나도 그냥 너무 싫어."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함께 상담센터에 방문해볼 것을 권했다. 나 역시 어떤 도움이든 응하고 싶었다. 다시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차오르며 한편으론 떨리기도 했다. 코로나 상황도 언젠가 끝날 테니, 이 우울에도 분명 백신과 끝이 있으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