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 글, 그림
노든은 코끼리 무리에 섞여 있던 흰 바위코뿔소였다. 코끼리 고아원의 유일한 코뿔소. 코뿔소지만 코끼리가 살아가는 법을 배운 노든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이대로 코끼리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코뿔소의 삶을 살기 위해 떠날 것인가. 모두의 우리 안에서 코끼리의 삶과 자세를 배운 노든은 고민 끝에 밖으로 떠났다. 새로운 코뿔소의 삶을 살기 위해서.
코뿔소의 삶은 노든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방법부터 가족을 이루는 일까지. 노든은 코뿔소 무리가 되어 새로운 우리를 만들었다. 우리 안에서 노든은 코뿔소의 삶을 살아갔다. 잔잔한 평화가 잔인하게 부서지기 전까지 말이다.
인간은 쉽게 우리를 박살 냈다. 총성 한 발에 소중한 가족이 눈앞에서 쓰러져갔다. 노든은 이성을 잃고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간신히 인간을 쫓아냈지만 노든은 모든 걸 잃어버렸다. 코뿔소가 될 수 있었던, 자신의 전부였던 것들이 인간의 욕심으로 무너졌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가족의 곁에서 죽어가던 노든을 발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인간이었다. 박혀 있던 총알을 제거하고 있는 힘껏 코뿔소인 노든을 살린 그들은 이름을 지어 노든을 '우리'에 가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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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노든에게 이름을 지었다. 이름을 짓는 것으로 노든은 코뿔소의 삶을 잃었다. 초원을 마음껏 달리던 자유와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노든은 이름 지어졌고 인간이 만든 철창에 갇혔다. 그들은 노든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선의가 아닌 자본의 논리에 따른 결정이었다. 희귀한 코뿔소를 동물원에 가두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 그것을 위한 이름이 그저 노든에게 주어졌다.
인간을 향한 분노에 잠겨버린 노든에게도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 동물원을 벗어난 적 없는 코뿔소 앙가부. 앙가부는 분노에 휩싸인 노든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었다. 둘은 동물원을 떠나 초원을 달리는 꿈을 꿨다.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는 힘껏 우리를 향해 몸을 부딪쳤다. 계획은 예상대로 흘러갔지만 변수가 생겼다. 노든이 다리를 다쳐 치료를 하는 사이 앙가부가 또 다른 인간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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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든은 다시 인간에 의해 무너졌다. 온전히 혼자가 되어버린 노든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함께여서 가능했던 탈출 계획은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인간은 노든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소중한 뿔을 잘라버렸으니까. 노든은 이름이 없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소중한 우리가 함께하던 그 시간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그때 인간의 우리는 간단히 무너졌다. 동물원에 불길이 휩싸였고 노든이 그토록 무너트리고 싶어 했던 철창이 힘없이 쓰러졌다. 그렇게 동물원을 도망치던 노든에게 새로운 우리가 찾아왔다. 양동이에 작은 알을 넣고 힘겹게 달리던 펭귄 치쿠. 둘은 언젠가 부화할 소중한 알을 품으며 삶을 나아갔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아 현실에 부딪쳤다. 무리를 하며 알을 품고 노든과 함께 나아가던 치쿠가 숨을 거둔 것이었다. 노든은 슬퍼하기도 전에 알을 품어야 했다. 둘이 함께 나아가며 소중히 지켜낸 알이었으니까. 코뿔소 노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내던 '나'는 그제야 독자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알에서 깨어난 아기 펭귄의 모습으로.
노든은 아기 펭귄인 나와 함께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호수에서 수영하는 법을 배우고 노든에게서 코뿔소의 삶을 배운 나는 노든의 새로운 우리가 되었다. 인간을 만나면 달려들던 노든은 나를 지키기 위해 도망가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분노보다 지키는 것을 택하는 우리로. 살아남은 그들은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노든이 그랬듯 나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다시금 인간들과 마주했을 때 노든은 도망가지 않았다. 트럭에 실려가는 결정을 내렸다. 곁을 지키고 싶은 '나'에게 노든은 선택의 시간을 주었다. 코끼리 무리에서 노든이 코뿔소의 삶을 선택했던 것처럼. 펭귄이 펭귄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어린 나의 등을 밀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노든은 나에게 살아낸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코끼리 무리에서 나와 코뿔소의 삶으로. 인간에 욕망으로 파괴된 현실에서 다시 앙가부를 만나고 치쿠를 만나며 버텨냈던 시간들. 마침내 나를 만나기까지의 일들. 길고 긴 밤이 지나 나는, 노든의 곁을 떠났다.
나는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바다에 도착했다. 펭귄의 삶을 시작하려는 나에게 노든이 들려준 이야기는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언젠가 우연히 노든을 만나는 순간을 꿈꾸며 나는 상상한다. 수많은 펭귄 사이에서 노든은 결국 '나'를 찾아낼 것이라고.
이름이 없어도 온전한 우리가 쌓여 만든 '나'를 노든은 알아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