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와 도덕과 신뢰
최근에 뉴스를 봤다. 주제는 청년 세대의 연애와 결혼에 관한 것이었다.
"...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서..."
저 말을 듣는 순간 씁쓸함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간 낭비. 어떤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연애와 잘 어울리는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다. 꼭 연애에 관련돼서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자주 듣는 말이긴 하다. 시간 낭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최근의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 시간뿐만 아니라 돈, 노력을 낭비하지 않는 것에 병적인 집착을 보인다.
관계 關係
關 - 관계할 관
係 - 매일 계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독일어로 관계라는 말은 Beziehung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beziehen(끌어당기다)이라는 동사에서 재귀적으로 사용되는 sich beziehen(스스로 끌어 당기다->관련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독일어와 위의 한자어 풀이를 보더라도 관계는 서로 가까워져 얽힌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면 필연적으로 일종의 피해(?), 손해(?) 같은 것이 발생할 수 있다. 시간을 쓰고, 돈이 들어가기도 하고,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은 관계 속에서 홀로 일 때보다 더 큰 '이익'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익이라고 표현하니 오해할 수도 있지만 관계에서 오고 가는 것의 핵심은 정서적 가치다. 정서적 만족이나 긍정적 감정들이 물질적인 것들보다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관계의 시작이나 끝맺음의 상황에서 우리는 추측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물으면 상대를 조금 더 빨리, 잘 파악해 앞서 말한 '낭비'를 하지 않고 손해를 줄이기 위함이라고 할 것이다. 혹자는 이를 합리(合理)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합리(合利)적이라고 말하는 게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일견 손실을 회피하려는 이러한 태도가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첫째로 관계에서 저 '판단'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관계에 뛰어들어 일정 시간 동안 관찰을 해야 한다. 몇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아주 짧은 기간의 행동으로 '테스트'를 해서는, 소위 재는 태도로는 그 판단의 정확성을 기할 수 없다. 그다음으로 이런 판단을 빠르게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가 먼저 나를 오픈하는 위험을 감내하는 것이다. 자신은 최대한 감추면서 상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상대도 내 감춘 모습에 맞춰 행동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君子喩於義 군자유어의
小人喩於利 소인유어리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논어(論語) 이인(里仁)편 16장-
관계의 저 딜레마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신뢰가 위험(Risiko)의 감수를 전제한다고 했다. 즉, 신뢰는 상대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배신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는 거다. 신뢰의 형성, 구축의 영역에서 우리는 의(義)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의리'라는 것은 인간적인 정에 의해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나 심지어 법과 규범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하지만 '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다. '의'라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것을 위해 칼을 드는 것,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알고 행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때문에 '이'라는 개념과 거리를 두고 도덕이라는 개념과 궤를 같이 한다. 이의 추구는 지속적으로 의로움과 도덕을 위협한다. 반면 의와 도덕이라는 개념은 원칙에 의한 행위와 관련되면서 예측 가능성을 높여준다. 때문에 믿음, 즉 신뢰를 높인다.
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e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st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도덕적 행위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위에 인용한 칸트의 정언명령 중 하나로 갈음할 수 있다. 저 말의 의미를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상대를 수단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가 아니라 '다만(bloß)' 수단으로써, 즉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각종 행위를 주고받으며 상대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를 접한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라는 존재를 무시한, 그리고 나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을 지향하는 수단만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논어 헌문편), 눈앞의 이익을 보았을 때 그것이 의에 합당한 지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우리는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나에게 맞는 사람인가를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인식하지만 그 기준만의 평가는 나의 만족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적 행동이 된다. 때문에 자신은 솔직하지 않고 재는 행동이나 타인을 테스트하는 행위 등이 모두 정당화되고 발현되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종교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관계를 나-너(Ich-Du) 관계와 나-그것(Ich-Es) 관계로 나눴다. 나-너 관계에서 나는 상대를 분석하거나 판단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상대의 존재 전체와 마주한다고 한다. 때문에 이 관계는 상호적(gegenseitig)이게 되며 양쪽의 존재가 함께 만들어내는 '사이(das Zwischen)'가 발생한다. 반면 나-그것 관계에서 나는 상대를 경험하고, 분석하고, 이용한다. 이는 칸트가 말한 상대를 수단으로만 대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악의가 존재하지는 않고 앞서 말했던 현대 사회에서는 나-그것의 관계는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그것이 모든 개인적 관계에도 접목되게 되면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비인격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솔직한 관계 속에서 전체가 드러나는 나, 확장되는 나가 부재하게 되면서 나 자신도 축소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見義不爲 無勇也 견의불위 무용야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 24장 中-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이것은 우리의 이익과 충돌한다. 때문에 고민이 생긴다. 올바름을 선택할 때는, 특히 그 선택의 상황에서 보면, 많은 희생을 수반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행위를 반복해야 축적될 수 있는 신뢰를 쌓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길이다. 늘 조금 더 쉬운 길이 우리를 유혹하지만 모든 관계에서 우리가 쉬운 길을 선택하면 이는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이익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길이 될 수 있다. 관계에서 필요한 용기는 상대를 '그것'이 아닌 '너'로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