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예술론

인생이 더 힘든 이유

by 캄프카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일반적으로 이 말은 SNS에 콘텐츠를 올리는데, 혹은 SNS를 통해 다른 이들의 콘텐츠를 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SNS는 인생의 낭비보다 해악에 더 가깝다. 실제로 많은 연구들에서 2000년대 초 중반과 2010년대 이후를 비교했을 때 청소년의 우울증이나 자살률이 늘어남을 지적하고 있고 그 주된 원인 중 하나로 SNS이용을 지적한다. 때문에 최근에 몇몇 나라들에서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하거나 제약하는 정책이 나오고 있다.


SNS는 사람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 대부분도 그걸 인정한다. 그것은 비단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그전에 잠시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이전에 친구에게 원래 인생은 x 같은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친구는 그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필자가 그 말을 했던 것은 과도하게 비관적이거나 회의적인 관점과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우선 인간의 뇌가 부정적 정보에 긍정적 정보에서 보다 훨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이 부정 편향(Negativity Bias)에 대한 개념은 수차례의 연구에서 입증된 결과다. 반면 쾌락에는 쉽게 둔감해진다. 개인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삶은 고통스럽게 인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Das Leben schwingt gleich einem Pendel hin und her zwischen dem Schmerz und der Langeweile.

인생은 진자처럼 고통과 지루함 사이를 오고 간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中)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SNS를 보면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애써 분칠 하려고 하는 듯 보인다. SNS에 올라오는 사진이나 짧은 영상은 그 자체로 정보를 맥락에서 순간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왜곡을 하는 성격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도 추가 요소를 덧씌워 그 순간 그대로를 올리지 않는다. 그대로를 찍을 거면 공유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때문에 '현실'은 정갈하고 깔끔하게, 혹은 아름답고 근사하게 꾸며진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도 멈추지 않는다. 필터라고 부르는 도구를 활용해 이 조작을 극대화한다. 요즘은 인공지능까지 활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뒤틀림의 대상에는 개인의 삶이나 상황, 장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보통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분야는 예술이다. 이런 관점에서 SNS 게시물들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걸 넘어 예술이 되게 하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삶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이는 부질없는 욕심일 뿐이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니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고 부질없다는 말로 그 노력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부질없다는 의미가 앞서 말한 인생은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과 예술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Wir haben die Kunst, damit wir nicht an der Wahrheit zugrunde gehen.

우리는 진실에 의해 파멸하지 않기 위해 예술을 지니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 것은 쇼펜하우어와 니체다. 둘은 모두 삶과 예술을 구분했다. 그리고 예술은 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또 두 사람은 삶의 부정적 성격에 집중했다. 다만 예술의 역할에 대해서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고통과 지루함을 오간다고 했다. 그리고 예술이 삶의 고됨에서 일시적으로 탈출하게 해 준다고 봤다. 니체도 인생은 끔찍한 것이라고 봤지만 예술이 포장해서 보여줌으로써 삶을 긍정할 수 있게 한다고 봤다.


우리가 SNS에 아름다운 현실과 외형을 올리는 것은 아무리 미적으로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게 하거나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 인식을 방해한다. 그것이 심해지면 타인에게만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이 문제는 비단 청소년에게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니다. 성인이더라도 이용의 정도에 따라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SNS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많이 소비하는 콘텐츠는 SNS에 국한되지 않는다. 유튜브를 위시한 영상 콘텐츠는 이미 우리 삶에서 없으면 안 되는 수준으로 자리 잡았다.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의 틈이 생기면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영상을 감상한다. 최근에는 소위 '숏폼'이라고 불리는 짧은 영상들의 제작과 수요가 늘고 있고 이에 대한 유해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영상 콘텐츠 자체에 대한 결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는 콘텐츠를 '소비'한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수동적으로 소비한다. 작금의 사회에서 생산되는 콘텐츠를 '문화 콘텐츠'나 '대중문화'라고 지칭하고는 하지만 이는 적절치 않은 구석이 있다. 문화라고 하면 자연발생적으로 아래에서부터 형성된 것을 말한다. 콘텐츠 생산의 구조적 측면을 보면 지금의 영상 플랫폼 및 라이브 플랫폼은 쌍방향 소통을 바탕으로 해 '문화'형성, 생산에 적합할 거 같지만 오히려 과거보다 더 심하게 하향식 콘텐츠들이 제작되고 있고 전파되고 있다. 무슨 밈이 유행을 하면 각기 같은 행위(춤, 동작 등)를 너도나도 따라 해 '다양한' 영상이 올라온다. 비슷한 결로 무슨 음식이 유행한다면 관련 음식을 시식하는 영상이나 시식평이 담긴 영상들이 판을 친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전체 이름: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는 문화산업 이론을 통해 이를 비판했다.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산업 생산 체계에 따라 제작되고 대중에게 주입되는 것이 현대의 콘텐츠들이며 때문에 이는 '대중문화'가 아닌 '문화산업'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문화산업은 욕구의 충족이 아닌 욕구의 강제적 생성과 주입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이러한 콘텐츠는 소비자를 수동적으로 만들며 이를 지속시킨다. 이 문화산업의 특징 중 하나가 '유사 개인화(Pseudo-Individualisierung)'이다. 앞서 언급한 예시와 비슷하게 겉으로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제작되고 소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비슷한 구조, 패턴으로 제작되고 소비된다는 것이다.


예술은, 그것이 쇼펜하우어의 것을 차용하건 니체의 것을 차용하건, 현실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이들은 결론적으로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지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콘텐츠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기만 하고 그저 소비될 뿐이다. 우리는 현실의 냉혹함과 가혹함에서 위로를 얻을 장소도, 이를 명확히, 하지만 '부드럽게' 인지해서 대응해 나갈 기회도 얻지 못하고 있다. 그저 회피와 망각을 위해서만 노력하는 꼴이다. 우리의 삶이 가혹한 데는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이 부분에도 한 자락의 근거가 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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