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란

꼰대에 대한 변명

by 캄프카

※이번 글은 원래 계획하던 글을 대신해 급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분량적으로나 논의의 깊이적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밝혀 둡니다. 필요하다면 추후에 다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필자가 살아오면서 정말 많이 들었던 말이 '넌 왜 그렇게 고집이 세?', '넌 왜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라는 것이다. 미리 밝혀두지만 필자는 상대의 의견이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을 뿐이고 나의 주장을 내세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처음 들었던 10대 후반, 20대 초반에는 스스로의 둥글지 못함과 편협함을 자책하거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도 하고 다시 한번 사유를 점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불합리'였다.


논리적 반박이 궁색해질 때 상대의 입을 막기 위해 동원하는 손쉬운 방어 기제, 그것이 바로 '독불장군'이라는 낙인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이 낙인처럼 활용되는 것이 '꼰대' 낙인이다. 최근 모 영상 매체에서 한 중견급 연예인이 '요즘 젊은 친구들은 완전 다른 경험을 하고 자란 세대잖아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후배들에게 무언 가 조언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며 나온 말이었다. 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아니 틀렸어야 하는 이야기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민주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태도다. 그럼 왜 그럴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소통을 방해하고 결국 통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더 나가면 이는 차별로 이어져 사회를 와해시키는 과정으로 흘러갈 수 있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이 다른 이의 의견을 무조건 수용하고 '응 그렇구나. 네 생각도 옳아.'라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다름을 인정한다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스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이해(Verstehen)를 위한 과정에서 선입견(Vorurteil)이 큰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선입견은 부정적 의미의 편견이 아니라 대화 이전에 이미 형성된 '이해의 지평'을 뜻하며, 우리는 대화를 통해 이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조정해 나간다. 즉, 대화는 이를 조정하는 과정인 것이다. 또 다른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의사소통에 대해서 누구든, 어떤 주장이든 문제제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도 누군가의 주장이 나의 것과 궤를 다르게 한다고 하면 반박을 하며 조정을 해가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배타적 꼰대 인식이 생긴 것은 2010년대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몇몇 정치인이나 셀럽들이 주최하고 진행했던 청년 토크 콘서트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주로 다뤄지던 담론은 '기성세대들이 잘못된 사회를 만들었고 지금의 청년들이 그 피해를 보고 있다. 기성세대로서 미안하게 생각한다.'와 같은 것이었다. 마치 과거의 것들은 단절해야 하고 새로운 세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사실 정말 잘못된 내용이었다.


이전 글에서 필자는 한국 사회는 윤리가 상실되었고 때문에 과도한, 그러면서도 원래의 도덕이 갖춰야 하는 보편성이 결여된 편협한 도덕성만이 남아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윤리는 간단하게 말하면 공공선을 추구하는 기준, 혹은 그걸 추구하는 것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 즉 개인들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그 공공선의 기준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그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전통, 문화, 사회의 역사적 배경들이다. 윤리는 이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즉, 과거의 것들은, 그것에 잘못된 결과나 요소가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모두 부정되어야 하거나 잘못되었다고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논의를 하고 조정해 우리의 자양분으로 삼았어야 하는 거다.


최근의 소위 '꼰대론'을 듣자면 이런 것들을 일방적으로 취사선택 하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읽힌다. 구 유고연방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에 지젝(Slavoj Žižek)은 현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용이 타인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건드리지 말라.'라고 하는 방어기제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실제 타인은 본질적으로 껄끄럽고 불편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러한 갈등 요소를 거세한, 이른바 '디카페인 커피와 같은 타자'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려 든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기성세대의 '잔소리'를 꼰대 취급하는 태도, 필자에게 과거 독선적이라고 지적했던 태도들은 모두 관용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단절에 대한 요구이며 이는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와해시키는 태도다.


과거 경험의 전승은 어떻게 이뤄질까? 당연히 대화를 통해서다. 누군가가 진정 '꼰대스러움'을 보인다면 그것은 대화의 영역에서 걸러질 수 있고 조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과도하게 경직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는 대화를 통해 조정하고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다. 사회적 경직성과 수직적 분위기가 소통 단절의 핑계가 될 수는 없으며, 이를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누군가는 기성세대들의 역할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세대의 역량을 평가 절하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다. 민주제 사회에서 모두는 동일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회 구성원이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스스로가 배우거나 배우기를 청해야 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가르쳐주거나 이끌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소통의 단절은 앞서도 말한 윤리적 의식, 그리고 집합 의식(Kollektivbewusstsein)의 부재를 야기한다. 이러한 단절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주로 20대와 30대 초반이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구세대'들이 '입을 다물어야'한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 2010년경부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합 의식과 윤리 의식의 부재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에 따르면 '아노미(Anomie)'상태, 즉 무규범 상태에 빠질 수 있게 한다.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최근 문제로 제기되는 저 연령대의 일탈 현상들은 이러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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