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해석된 죽음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다. 마지못해 산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인데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말이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원칙적’으로는 없다. 죽기를 원하는 ‘욕구’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하는 생각이고 이것은 따라서 철저히 사회적 산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순적이지 않다.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조금 다른 종류의 고민을 한다. 어떻게 가치 있는 삶을 현실화할까에 대한 고민으로 사는 게 아니라 언제, 어떻게 삶을 마무리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산다. 스스로가 살아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게 고민의 시작이었겠지만 당장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죽지 말아야 할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은 터부시 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자살은 부정적인 행위지만 한국에서는 결이 조금 다르다. 우리는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사자의 잘못을 질책하는 경우가 많다. 유명인들의 자살에 대한 코멘트들을 보면, 특히 과거에는 죽음을 선택한 결정에 대한 비판이 주류였다. 자살이 죄악이라는 종교적 관점에서 나온 원론적이고 원색적 비난에서 ‘그럴 용기로 살아야지...’로 대변되는 다양한 부정적 인식들이 쏟아졌다. 최근에는 그래도 사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안타까워하는 의견들이 주류를 이룬다. 다만 자존감이 낮아서,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아서 극단적 행동을 택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최근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코미디언 박지선 씨의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은 ‘자존감이 높아 보였는데...’였다. 자존감이 높아 보였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서 이런 극단적 선택을 했나 보다는 흐름이 엿보인다. 이 의식을 반대로 적용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살과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리고 우리가 정의하는 자존감은 뭘까?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자존감이 주요 테마가 됐다. 그러면서 자기를 사랑하자는 구호나 그런 방법을 알려주는 강연 등이 인기를 끌었다. 자존감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자존감의 사전적 정의는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사랑이 존중이라는 감정에 포함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존중을 하게 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존중을 할 수 있다. 그럼 왜 자기애가 자존감을 높이는 필수 요소로 알려지고 있는 것일까?
몇 년 전부터 힐링 열풍이 불었다. 삶이 각박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했다. 힐링의 내용은 일종의 정신 승리 혹은 책임과 결과의 내면화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고난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주 나왔던 이야기가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힐링이 수명을 다 할 즘 여기서 힐링이 빠지고 자존감을 높이자는 이야기가 대신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자존감을 높이는 첫 관문처럼 됐다.
여기서는 모든 게 다 괜찮다고 한다.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다는 걸 인식하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고 그렇게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에서의 자존감으로 생각해 보면 스스로를 정확히 분석해 이해를 하는 게 우선돼야 할 조건이다. 그 배경 하에서 사회 속에서의 자신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인간이 본인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이 그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스스로를 괜찮다, 나는 가치 있다고 해도 사회가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 절반의 인식에서는 다 괜찮은 건 아닌 게 된다. 내가 힐링과, 자존감의 논리를 좋아하지 않는 건 이 지점이다. 이들은 사회적,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고 개인에 대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 현실과 동떨어진 해답만 제시한다.
자존감은 사회 구조적으로 인지되는 부분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본인을 분석하고 인식할 수 있는 사회적 성과물들이 있다. 그를 바탕으로 본인의 확고한 상이 있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 없이 자신의 이상을 관철시켜 나간다. 이들은 매우 강인해 보이는 데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람들이 자살과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런 속성 때문에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본인의 철학과 신념이 현실, 혹은 본인의 행동으로 인해 사회적 평가와 자신의 인지 사이가 심각한 괴리를 드러낼 때, 그래서 삶의 품위를 잃고 삶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때’가 되면 그들도 자살과 가까워진다. 대중의 인식처럼 자존감이 금락 한 것이 원인이기는 하나 그게 그 사람이 평소에 낮은 자존감을 가져서, 이를 숨기고 살아서가 아니다.
에밀 뒤르켐의 말처럼 자살은 사회적 문제다.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 죽음의 책임을 나눠진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다시금 이를 개인적 책임으로 전가시킨다. 그렇게 우리의 인식이 머물러 있다면 OECD 자살률 1위 국가의 불명예는 계속해서 우리의 차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