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하우스에 대한 오버
최근 클럽하우스라는 SNS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굉장히 특이하게 말로 하는 SNS, 대화를 하는 형태의 SNS라고 한다 (필자도 써보지 못해서 정확하게는 모른다). 처음 이 SNS의 컨셉을 듣고 참신하다 생각돼서 서둘러 검색을 해 가입을 했다. 그런데 이용할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이미 가입한 사람에게 초대를 받아야 이용 가능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인싸들의 SNS, 엘리트들의 SNS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덤을 알게 됐다.
주변에서 인싸 성향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작한다는 소식을 다른 SNS에 알리기 시작했고 반면 나의 기억에서는 서서히 잊혀 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시사 라디오에서 이 SNS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패널은 클럽하우스를 소개하며 정말 다양한 주제들의 대화가 이뤄지는 이 소셜 미디어에서 최근 여기서 인싸들만 모여라, 아싸들만 모여라는 방들이 개설되고 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눈다고 했다.
간혹 다른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스스로를 아싸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에서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든가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사진과 올리면서 본인의 소위 말하는 '아싸력'을 과시하는 경우를 보고는 한다. 아마 자기가 스스로 정말 아싸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척'은 하지 못했을 거다. 다만 역설적으로 이런 심리는 오히려 '연결'에 대한 갈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우리는 다변화됐고 다층화 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런 현대 사회의 핵심 욕망을 잘 표현해 주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연결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가 파편화돼서 연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서만은 아니다. 최근으로 오면서 과거에 사회생활, 인맥이라는 이름으로 통합 관리되던 연결이 더 세분화되고 집중화됐다. 사람들은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의 구성을 욕망하면서도 질적으로도 높은 연결을 원한다.
최초의 SNS들은 오프라인 상에서의 인맥을 온라인 상으로 옮겨오는 역할만 수행했다. 하지만 곧 불특정 다수와도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갔다. 이런 오픈형 시스템은 여러 사회적 이슈들과 맞물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예상치 못하던 일들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으로 국한해서 보면 2000년대 초중반에 있었던 한국의 촛불집회와 2016년 말부터 17년 초까지 이어졌던 촛불 탄핵 집회, 그리고 해외의 경우는 2011년에 있었던 아랍의 봄 사건들을 들 수 있다. 이런 사건들은 이전의 사회 운동의 형태를 항구적으로 바꿨다.
서두에 소개했던 클럽하우스는 이러한 성격에서 약간 벗어난다. 음성 중심이라는 점이나 대화에 참여, 청취하는 방식에 대한 특이점들도 이 새로운 소셜 미디어의 특징 중 하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가입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이미 회원이 된 사람의 초대장을 받아야지만 가입이 가능한 이 형태는 과거 영국의 사교클럽을 연상케 한다 (개발사가 영국 회사인 건 이유가 있달까?). 게다가 가입 후에 대화에 참여를 할 때도 남의 대화방에 들어가면 허락을 받아야 대화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차등적이고 권위적이다. 이런 요소들을 '즐기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 앞서 클럽하우스에서 '아싸들 모여라'는 방이 개설되어 이야기가 오고 간다는 말을 전했다. 여기에 아싸는 없다. 아싸는 이 클럽하우스에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아싸는 아싸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규정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종종 잘못된 규정이 잘못된 프레임을 만들고 이게 사회 문제일 경우 이를 해결하는데 큰 장애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차등적으로 '선별된' 그룹이 규정을 하는 주체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여타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생각보다 수평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언어습관이나 유희 문화에서 계층 차등적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이를 쫒는 경향이 강한 성향 때문에 이런 보편적 문화 소비가 나타나고 고등교육 보급률이 매우 높은 탓에 언어적 격차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조건은 소통에서 기본적 제약을 없앤다. 한국에서 소통을 제약하는 다른 많은 요소들이 존재함에도 집단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시민 사회의 운동이 발생하는 요인 중 하나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반면 유럽의 국가들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계층 분화적 문화를 내포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끼리 문화가 잠재하고 있다. 우리에게서 연령간의 차이로 나타나는 요소가 그들에게선 계층 간의 차이로도 관찰된다. 이를테면 언어 습관이나 즐기는 문화 컨텐츠들에서도 계층 간 차이가 나온다. 그들의 역사에서도 이런 요소들은 강하게 감지된다. 민중에 의한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았던 우리와는 달리 그들이 자랑하는 프랑스 대혁명 조차도 계몽주의자들과 부르주아들의 합작으로 탄생한 작품이었다.
불평등은 과거에도 큰 문제였지만 최근에 와서는 특히나 주목받는 사회 문제적 요소가 됐다. 저성장의 사회에서 불평등은 성장을 더욱 저해하는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경제 영역에서만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 최근 유럽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극우주의적 행동들이나 그 영향력이 커지는 부분도 근본적으로는 불평등에 기인한다.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기 때문에도 걱정이지만 거기서 더 나가 사회적 연대의식, 집단의식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특히 걱정하고 있다.
한국의 불평등 문제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다른 나라의 불평등 문제처럼 근본적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계층 간의 소통이고 그를 바탕으로 하는 이익의 조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통된 집단의식이 존재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제의 개념화가 이뤄져 이에 대해 다시 공감을 형성해야 한다. 한국에서 특히 이뤄지지 않는 부분이다. 이런 와중에 한국의 트렌드는 '차별성'에 집중되고 있다. 어떤 제품을 쓰면 '특별한 당신'이 될 수 있다고 광고하고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본인들이 즐긴 차별화된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일반의 삶이 아닌 차별화된 상류층의 삶을 묘사한 드라마들이 연일 상종가를 친다.
클럽하우스의 초대권을 사고파는 거래가 온라인 상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들'의 놀이에 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해 준다. 이제는 놀이에서도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소셜 미디어에 '오버'를 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입한 사람을 통해 두 명까지 초대장을 발부한다는 발상에서 계층을 형성하겠다는 오만이 읽힌다. 그리고 그 오만에 올라탄 사람들은 '선택된 자'의 기분을 느끼며 이를 공유하고 다른 이의 부러움을 산다. 그리고 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만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확산하고 고착화한다. 전형적인 엘리트주의다. 이런 엘리트주의가 가져오는 폐단을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하지만 클럽하우스는 '재밌고' '유익한' 시간을 선사한다. 그래서 오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