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위에 올라선 민주주의
최초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주어졌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투표라는 낯선 행사에 참여했다. 왕이나 양반을 직접 뽑는다는 수준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로 투표가 이뤄졌다. 그럼에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는 꽤나 선진화돼 있었다. 당시 유럽의 몇몇 국가들도 도입하지 않았던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됐고 투표 참여율도 엄청나게 높았다 (48년 초대 총선 95.5%).
하지만 쟁취하지 않은 민주주의, 주어진 민주주의의 대가는 혹독했다. 이후 거의 50여 년에 걸쳐 독재 정권이 이어졌고 그중 약 26년은 군부에 의한 독재였다. 다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찾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니 단순히 시간만 필요했던 게 아니라 많은 피가 흘렀다. 80년 광주에서의 비극적인 유혈과 87년의 희생으로 간신히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간의 강도 높은 핍박과 장기간의 독재에 대한 반작용만큼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을 끊었다. 사실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당연한' 민주주의가 이어졌다.
2016년 겨울, 한국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찾기 힘든 장기간의, 그러면서도 평화적인 민주화 시위가 전개됐다. 이 사건을 특정 정치 진형의 승리쯤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이를 계기로 한국의 정치, 사회 지형의 상당수가 '반영구적으로' 바뀌었다. 아주 공고하던 보수적 인식이 깨졌고 사회 근본적 문제점에 대한 논의와 함께 사람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인식도 전향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평화를 통한 승리'도 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8년부터 대략 10여 년 간의 시간 동안 역시나 많은 피가 흘렀다. 용산참사가 있었고 백남기 농민의 희생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월호의 무고한 희생자들이 있었다.
민주주의에는 이렇듯 필연적으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대의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흘러가며 실패하고 강력한 왕권을 지닌 고대 국가들이 생겨났다. 이 시스템은 오래도록 유지되다 18세기 1차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부의 분배 구조가 개편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본을 소유하게 된 새로운 권력층이 나타나면서 기존의 권력층 사이에서 힘겨루기가 생겼다. 기존의 권력층은 매우 강성했고 관습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뺐어오기 위해서는 새로운 논리에 기반하면서도 확고한 지위에 있는 정당성과 과거의 것들을 타파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시스템이 필요했다.
새로운 권력층, 부르주아지들은 이를 위해 계몽주의자들이 주창하던 사회계약론에 의거한 민주적 가치를 차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기존의 권력층과 새로운 질서와의 충돌. 민주주의의 형성이 피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민중에게, 시민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명문화한 정치 시스템이다. 물론 이도 최초에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지만 점차 실제화됐다. 이 시스템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춰지는 시기는 서로 달랐지만 구 권력과의 충돌하는 구도는 비슷하게 발생했다.
민주주의는 절차의 시스템이다.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절차가 구비돼 있어야 굴러갈 수 있다. 앞서 서술한 유혈을 동반한 저항의 목적은 보통 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들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그랬고 현재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유혈사태도 이를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다. 하지만 절차가 갖춰진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완전히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이 시스템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요소들이 필요하다. 핵심은 최소한의 연대의식과 집단의식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죽음이다.
민주주의가 각 개개의 시민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그들을 위해서 운영되는 시스템인 만큼 그 개체들의 죽음은 각각 의미가 있다, 아니 그 의미를 우리가 찾아야 한다. 누군가가 분신을 할 때, 누군가가 철로에서 안전문을 열지 못해 생을 마감할 때, 누군가가 기계에 끼어 유명을 달리할 때 우리는 이 비극을 마주하고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꼭 죽음만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는 일에도 그래야 한다. 누군가가 크레인에 올라 수백 일간 고공 농성을 할 때, 누군가가 수십 일간 곡기와 물을 끊고 단식 농성을 할 때, 이렇게 목숨을 걸고 본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할 때 역시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옆에서 같이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연대의식이고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게 최소한의 집단의식이다.
사회는 매우 세밀하고 민감한 부품들로 구성되어 굴러가기 때문에 여기서 어떤 완벽함을 만들거나 완성을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그 안에서 죽음이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 거다. 그래서 다시 문제는 우리가 이 죽음을 어떻게 다루냐는데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죽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죽음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래서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사회가 이런 죽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그 사회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그 사회 속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자,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 속의 죽음을 올바르게 다루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