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되지 않은 죽음
지난 2월 독일의 월간 시사잡지 슈피겔 (Spiegel)에서 주목할 만한 기사가 실렸다. 최근 독일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죽음의 도움(Sterbehilfe)’에 대한 인터뷰 기사였다. 독일어 Sterbehilfe는 사전적으로 ‘존엄사’라고 나와 있지만 한국에서 다뤄지는 존엄사 개념의 범주가 매우 좁기 때문에 서술적으로 풀어서 쓸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격렬한 논의 끝에 2018년 연명의료법이 통과됐다. 이를 통해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를 통해서 생을 이어가는 의료 행위를 포기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여전히 개인은 생의 결정권을 지니지 못한다. 심지어 이 조건을 만족하더라도 미리 특정한 양식의 서류를 작성해 놓은 경우에만 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 기사에서는 독일 개신교 및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죽음을 죄악시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점과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프로세스 마련이 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미 일 년여 전에 독일의 헌제에서는 죽는 것을 도와주는 행위가 기본권에 속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더 정확하게는: 실무적 단계에서 자살을 장려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그런 행위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단체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독일에서 헌제의 판결은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사회의 집단의식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헌제의 판결에 맞춰 사회의 구조를 다시 잡고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기사의 인터뷰이인 이솔데 칼레 보훔 대학 실천 신학과 교수는 헌제의 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관련된 법안의 마련이나 제도 개선에 소극적인 정치권을 비판하고 이렇게 기준이 만들어지지 않아 실제 관련된 일을 수행할 때 법적 불안정성이 발생하는 것을 지적했다.
한국의 현재 기준에서 이런 논의는 충격적일 수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는 ‘존엄사’를 논의할 때 전제가 깔린다. 인간의 생명은 '무조건적'으로 지켜져야 하고 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시각이다. 이런 전제는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동에 관련된 모든 논의를 원천 차단한다. 그나마 2018년 일부의 존엄사를 허용하는 조건이 만들어진 이유는 살아있는 가족들의 경제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실용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 전제는 인간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는 종교적 교리에 기반한다. 대부분의 종교 교리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때문에 반론이나 재론의 논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는 보통 관습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그리고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이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한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의 비율이 OECD 가입국 중에서 가장 높다는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이런 죽음을 비판했고 지금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금 관대하면 측은지심을 가지는 정도다. 이런 태도들이나 인식은 이 죽음을 적절히 다루려는 노력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그 개인의 ‘특수한’ 문제에 기인한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는 양상을 보면 의지적 죽음의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그 이유로 늘 거론되는 것이 ‘이익’과 ‘피해’다. 그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선택한 자들이 생전에 겪었던 빈곤함이 주목받고 그들이 아주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그러한 ‘이유’가 있으니 그걸 해결해 주면 그들이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유를 찾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이 죽음의 전반적 양태를 다루지는 못하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절망적 상황이나 고통 때문만이 아니라 그냥 생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겠거나 그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경우들이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 다양한 이유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은 어떠한 이유 때문이든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에게 마련해 줄 수 있는 프로세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프로세스라는 것은 죽음을 결심한 사람을 설득하고 정신과 상담 및 치료를 통해 삶을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무료 상담과 정신과 진료 지원 프로그램 등은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다만 접근성이 좋지 못하다. 사람들이 쉽게 이 프로그램을 접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심지어 프로그램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기본적으로 죽음을 터부시 하는 분위기에서 이를 가족들이나 주변 지인들에게는 터놓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여기서 접근성마저 좋지 않다면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담을 받기 위해서 용기를 내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그런 절차를 포기하거나 생략하고 실행의 단계로 넘어가기 쉽다. 그게 우리나라가 앞도적 수치로 자살률을 기록하는 현실의 원인이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에 접근했더라도 지원하는 내용은 겨우 몇 번의 상담과 정신과 진료를 연결해 주는 것이 거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결국 국가의 입장에서는 돈과 인력을 쓰고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렇게 '방치된' 개인들은 죽음을 스스로의 계획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방법으로 실행을 한다. 그 이후의 ‘비용’은 그들의 가족들에게 전가된다.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개입된 인식은 이와 관련된 논의에도 비슷한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적절한 프로세스를 마련하기 위한 논의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프로세스의 부재 상황에서 의지로 수행된 죽음은 비루해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터부시 되는 것은 그 주제가 무엇이든 별로 좋지 못한 결과를 야기한다. 게다가 자살은 이미 한국에서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고 국제적인 비교를 했을 때도 거의 전 연령층에서 심각한 수준의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에 소득 불평등의 감소나 재분배, 그리고 기타 삶의 질을 올리고 개인이 지나친 스트레스와 극단적 상황에 몰리지 않게 하는 사회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자살률은 낮아질 수 있겠지만 자살이 사라질 수는 없다. 더욱이 이런 조치들은 궁극적으로 장기적인 계획하에서 진행돼야 하는 부분이고 당장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대책들도 마련돼야 한다. 이 문제는 사람과 사회가 연관돼 있기 때문에 자살률이 일정 수치 이하로 감소됐다고 해서 관심을 끊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무조건적인 비용을 발생시키고 이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전가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정리해야 하는 문제들도 있다.
인식의 변화가 인간의 행위와 사회 현상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이미 벌어지고 있는 사회 현상이나 사회 흐름을 무시한 인식의 변화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방식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 길은 요원할 것이다. 충고나 권고, 교육을 통해서만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자살은 방지해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관리해야 하는 문제다. 그 어떠한 삶도 비참하고 비루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듯 세상의 어떠한 죽음도 비참하거나 비루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관습적 도덕관에서 벗어난 '자살'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