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캄프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1880년대(81년이라는 자료와 85년이라는 자료가 공존한다) 쓴 단편 소설의 한국어 제목이다. 러시아어로 이 작품의 제목은 'Что же человеку жить(도대체 사람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각 개개인의 삶의 목표는 다양하다.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 이유는 그 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삶의 목표라고 하면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개인적, 사회적인 지위나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삶의 종착지에는 누구에게나 죽음이라는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떤 성취를 거두건 어떤 형태의 삶을 살 건 마지막에 맞이하게 되는 것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흔히 하는 말로 '답정너'의 상황이다. 어차피 죽을 건데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아니 애당초 왜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보통 답정너의 질문에는 대답의 가치를 못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삶을 이어가는 문제에서 이 답정너의 상황을 우리는 능동적으로 타게 해야만 한다.


이 작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 미하일은 벌을 받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하느님은 인간 세상에서 미하일에게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라고 명한다. 그것은 '사람의 안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이었다. 미하일은 작품 속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며 사람의 안에는 사랑이 있고 사람에게는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그러한 까닭에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두 번째 질문이다.


사람은 다가올 미래를 예상이나 예측을 할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로 인해 우리가 겪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불안은 두려움이나 걱정, 분노, 우울과 같은 또 다른 부정적인 감정을 낳는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사람을 무기력하면서 공격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정말 부정적이기만 한 걸까?


만약 우리가 모든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앞서 언급한 몇몇 부정적인 감정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긍정적인 감정들, 예컨대 기쁨이나 행복 등도 느끼지 못하거나 지금보다는 아주 적은 정도로 느끼게 될 것이다. 더불어 다른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끼게 될 것이다. 미래의 모든 상황을 알 수 있다면 마치 운명 결정론이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영향처럼, 삶을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도전, 열정, 노력과 같은 가치들은 우리의 인생에서 의미를 잃을 것이다. 인생에서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부정될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이들은 강력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은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발생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다. 불안을 위시한, 우리가 일상에서 쉬이 겪고 있는 이 부정적인 감정들 역시 우리가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들을 억제하고 제거할 긍정의 힘이 필요한데 그중 가장 강력한 감정이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것 또한 우리가 벌어질 일을 모두 알 수 있다면 그 영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상황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발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필요조건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확실성을 극복하게 해 주는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호감을 갖는 이성 간의 감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보호 본능 및 애정 또한 사랑에서 기인하며 우리가 타인에게 느끼는 측은지심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광범위하게 적용하자면 우리가 관계에서 얻게 되는 긍정적 감정의 총화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는 관계에서 늘 긍정적인 감정만 느끼지는 못한다. 오히려 작금의 현실에서 개인들은 관계에서 부정적인 감정, 스트레스를 느끼는 듯하다. 관계의 단절로 인한 여러 사회 문제들이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긍정적이게 흘러갈 수 있는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소통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소통이라는 말을 단어 그대로 이해하자면 무엇인가를 잘 풀어서 설명하여 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통은 기본적으로 언어적 활동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언어적 소통을 불편해하거나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소통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소'를 잘할 수 없거나 미숙함에 기인하는 부분과 어찌해서 소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통'하지 않는 경험이 쌓여서 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언어적 표현력의 부족뿐만 아니라 그것을 솔직히 표현해도 괜찮은 주변의 상황, 이를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화자들의 태도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모두의 문제다.


이런 모든 어려움에도 소통은 무의미하지 않다. 앞서도 말했듯 소통의 부재는 관계의 단절을 야기하고 이런 상황은 명백히 '사랑'이 결핍된 상황이며 그러한 인생이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점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회로 달려가고 있다. 각 개인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이야기하고 전문가들도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고 있다. 우리의 안에는 사랑이 있다고 하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상황들을 왕왕 발견할 수 있다. 과연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게 맞을까? 우리의 소통과 관계 맺음을 곱씹어 보면 그 해답의 윤곽에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