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핵심만 간단히'는 필수적인 요소다. '아무리 옳은 소리도 듣기 싫게 한다면(지루하다면)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라는 말은 어찌 보면 청자의 불손한 태도 문제일 수도 있는 상황을 정당화시키고 있음에도 마치 당연한 명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필자는 살면서 지속적으로 말과 글의 지루함을 지적받아왔고 받고 있다. 때문에 '핵심만 간단히'를 성토하고 '지루함'을 옹호하면 정당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핵심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나머지 누락되는 맥락을 직관에 의존해 채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직관을 구성하는 경험이 일천하다면? 때로 그러한 태도는 본질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정의'라는 가치가 한국사회에서 주목받은 지는 꽤 됐다. 2008년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긴 했지만 굉장히 학술적인 그 책이 책 소비가 많지 않던 한국사회에서 누적 200만 부라는 쾌거를 거둔 것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이 책의 내용을 봐도 그렇고 정의라는 개념은 참 복잡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민주제 사회에서의 정의에 접근하려면 민주제 원칙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민주제가 무어냐고 물었을 때 나올 수 있는 첫 대답은 '국민(정확히는 시민)에 의한, 국민(시민)을 위한, 국민(시민)의' 정치제도라는 것일 거다. 그럼 시민 다수의 의사와 반한 의견은 무조건 정의롭지 못한 것이고 시민 다수의 의사를 따르는 것은 정의로운 것일까? 이는 또 무조건 그렇지만은 않다. 민주제는 한 마디로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정치제도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의견을 낼 수 있고 그 다양한 의견을 통합해 가야 하는 제도다. 다양한 의견은 단순히 시간을 지연시키는 요소가 아니라 더 좋은 방안을 얻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거나 과도하게 한쪽 측면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는 주요 장치다. 극단주의를 방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한 좋은 의견은 다수일 때도 있지만 소수일 때도 있다.
그럼 모든 의견이 민주제 사회에서는 담론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20세기 후반의 사회에서 이는 절대 미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사회에서 우리는 이를 악용한 세력들이 저지르는 민주제 파괴행위를 목도하고 있다. 어떠한 의견이 사회적 담론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공유할 수 있는 가치(집단의식/집합의식 Collective awareness, Kollektivbewusstsein)에 부합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여론 조사로 확인할 수 있는 다수의 견해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규정된 가치, 예컨대 헌법과 헌법적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이런 개념하에서 정의는 무엇일까? 혹자들은 법률을 엄수하는 수준을 정의롭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상식처럼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인다. 사실 이 명제는 틀렸다. 아니 이 명제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이 명제의 원래 의미를 곡해하는 견해와 해석이 틀렸다. 법은 사회 윤리 중 아주 최소한의 것을 규정하는 장치다. 마치 에스프레소의 크레마 같은 것이다. 에스프레소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요소이고 좋은 원두로 추출하면 좋은 크레마가 형성되지만 크레마만 맛보고 에스프레소를 맛봤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법만 지키면 최소한의 도덕적 선을 행했다는 인식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정의를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은 보통 개인 차원에서 옳은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적이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히려 누구나 지켜야 할 보편적 원칙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 누구나 지켜야 할 올바른 삶. 한마디로 도덕을 정리하면 그렇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정의를 설명하기 힘들다. 때문에 관습, 공동체 규칙, 역사적 배경에 의거한 윤리가 나온다. 그리고 윤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개인의 도덕도 사회적 윤리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본다. 어쨌든 이 도덕과 윤리는 정의를 규정하는 두 가지 핵심적 가치이면서 이 둘을 어느 선에서 적용하느냐에 따라 정의는 성격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복잡한 개념을 우리는 교육과정이나 가정에서 충분히 습득시키고 체득시키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한국의 극우 세력의 득세와 그 흐름의 핵심이 여기에 존재한다고 본다. 그리고 서구의 비슷한 현상의 원인과 차이점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본다. 한국은 이러한 가치를 가정의 교육에서나 공적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것을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비효율적이고 의미 없는 취급을 해왔다. 높은 한국의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이해, 의식은 상대적으로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민주화 이후 사회적 의식, 공동의 의식을 만들지 못한 채 그 자리를 자본주의, 그리고 이를 넘어선 물질주의와 능력주의가 차지했던 것도 한 이유다. 반면 사회 간의 특수성과 개별성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유럽 사회는 커뮤니티의 관습, 역사를 중시하는 보수적 색채를 띤다. 때문에 윤리의식은 잘 갖춰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 수준으로 인해 도덕의식의 보편성이 들숙날숙한 결과가 됐다.
이러한 배경의 차이로 현상적 차이도 벌어지는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일탈이 고등교육을 받은 집단과 사회 고위층에서 많아진다. 물질주의와 능력주의는 그 자체로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일 수 있는데 정의의 개념이 전수되지 않다 보니 이 두 흐름에 잘 적응하고 이 시각을 잘 내재화 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자본에 접근할 권한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반면 유럽 쪽에서는 저소득 지역이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일탈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다른 게 아닌 '지루함'일 수 있다. 우리는 그것과 전쟁 중이다. 지루함은 비효율의 다른 이름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정의를 위해서는 지루함을 극복하고 들어야 하고, 지루함을 극복하고 읽어야 하고, 지루함을 극복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지난한 정보의 업데이트와 개념의 업데이트를 해 나가고 이를 다시 기나긴, '답이 없어 보이는' 과정을 통해 전달하고 훈련시켜야 하는 것일 수 있다. 아니 이미 우리는 그 과정을 걷고 있는 듯 보인다. 20년 전과 비교해 우리는 달라졌고 10년 전과 비교해도 달라졌으며 불과 3년 전과 비교해도 우리는 꽤 달라졌다. 그렇기에 이 느려 보이는 변화도 우리가 극복해야 할 지루함의 과정일 것이다.